쌍백합 제94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본문
X.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선태 주교 옮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요한은 요르단강에서 주님께 세례를 베푼 다음 날, 다시 강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리고 다음 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제자들에게 같은 말을 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청중들은 이 신비로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청중들의 영혼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아주 오래된, 거룩한 기억들이 일깨워졌습니다. 곧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이 해방되던 밤에 이집트 땅에서 도살되었던 파스카 양의 형상이 떠올랐습니다. 어린양처럼 인내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하느님의 종에 관한 이사야의 말씀(53,7)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어린양’의 형상이 신비스럽게 속량하시는 메시아의 사명을 표현한다고 이해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의 의식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속량하셨던 주님은 갈수록 하느님 어린양의 형상과 이름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이런 점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은 바로 요한 묵시록입니다. 여기에서 어린양은 ‘살해되었지만 살아서’ 제단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어린양만이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고, 그 제단으로부터 엄청난 은총이 흘러나오게 하고, 모든 것에 축복을 내립니다(묵시 5,6 이하 참조).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 관한 형상과 언어는 교회의 전례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특히 미사성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 사제는 빵을 쪼갭니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다음 회중은 ‘하느님 어린양’ 하고 기도합니다.
감동적인 이 기도는 종종 노래로 바쳐집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한 번이나 세 번만이 아니라, 빵 나눔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반복하여 기도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수가 제한되었는데, 오늘날 교회는 세 번 반복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이 거룩한 말에는 깊은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의 근저에 이미 놓여 있는 진리입니다. 곧 한 존재가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는, 그의 운명을, 그의 죄를 대신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어쩌면 지금 이 시대는 이전보다 이 진리를 더 깊이 깨달아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각자가 고립된 개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고,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고통을 겪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나일뿐인데, 다른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순전히 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의지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노부모는 자녀에게 의지합니다. 한 직업은 다른 직업에, 한 전문 분야는 다른 전문 분야에 의존합니다. 한 사람이 어려움에 이르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합니다. 한 사람의 장점은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웁니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과 체험, 그리고 불행을 통해 배웁니다. 누군가의 선행은 모범과 격려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악행은 당사자를 악으로 이끌지만, 선행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누군가 죄를 짓거나 죄책감에 빠질 때, 누가 쉽게 “내 알 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를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육체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 일어납니다. 혐오감, 분노, 연민,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는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기심이 우리 마음을 심하게 경직시키지 않았다면, 타인의 죄를 마주했을 때, 그 죄가 우리와도 관련이 있다는 내면의 느낌을 갖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어떻게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고귀한 영혼이라면 타인의 죄를 외면할 수 없으며, 그 죄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대한 영혼들, 곧 진정으로 선택된 영혼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비참함과 무거운 죄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며, 두렵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인간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며,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혈연, 가문, 친족, 공유된 환경과 조건, 공유된 운명, 영향력, 교류, 본보기라는 연결고리로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존재 전체가 온갖 종류의 인연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본래 하나의 가족, 하나의 생명체, 하나의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경우,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가족을 통해서, 국가를 통해서, 또는 공동체를 통해서 영향을 받는 것을 볼 때, 의로운 감정은 처음에는 반발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는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는 감추어진 정의가 작용하고 있어. 공동체의 축복을 함께 나눈 만큼, 공동체의 짐도 함께 나누어야 해. 공동체의 고귀한 행위에 동참하는 만큼, 공동체의 악행에도 함께 나누어야지. 다른 사람의 업적과 고귀함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비록 처음에는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더라도, 그들의 죄악에도 책임을 져야 해.’
진정으로 고귀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기회가 생긴다면 기꺼이 이러한 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타인의 죄에 대해 자발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형제자매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 어떤 아이가 그를 대신하여 벌을 받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불공평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동을 받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공동 책임의 심오한 의미를 깨닫고, 관대한 연민으로 적절한 결론을 내렸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형제자매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자발적으로 떠맡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영혼에는 숭고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곧 누군가가 타인의 죄에 대한 공동책임을 인식하고 그 책임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 즉 공범임을 느끼고 그 공동의 죄를 위해 나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정의일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러한 정의의 기준을 넘어 자발적으로 타인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는 것은 가장 큰 용기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곧 누군가가 형제자매와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순수하고 이타적인 사랑으로 그들의 죄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영원히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장엄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인간도 타인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질 만큼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당해야 합니다. 타인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려 드는 것은 교만이며, 주제넘는 오만한 태도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바로 이 대속의 신비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심오함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롭고 선한 의지를 가진 존재로, 그리고 명확한 통찰력을 가진 존재로 순수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힘과 은총을 주셨고,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온전히 순수하시고 온전히 거룩하신 분께서 인류의 거대한 집단적 죄를 스스로 짊어지십니다. 그분은 신성한 지혜와 호의로 그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분은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정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이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가장 순수한 관대함, 가장 순수하고 넘치는 사랑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분은 우리 인류 공동체에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십니다. 그분은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자발적으로 우리 죄악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십니다. 그분은 마치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죄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마치 그분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속죄하십니다.
이 신비는 참으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고,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죄를 대신하고, 더 나아가 공동 책임의 의식으로 그 죄를 진지하게 대하는 것을 볼 때 경외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런 최상의 정의를 경외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보편적 책임의 구조 속에 진정으로 깊이 얽혀 계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강요 없이, 온전히 자유롭게, 당신의 피조물이 지은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그 숭고한 성품은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악하고 경솔하며 비참한 인간의 죄를 자발적으로 짊어지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강력하고, 이타적이며, 열정적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토록 장엄한 성품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순결하신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공동체에 그토록 완전히 자신을 내어주실 때, 마치 자신을 버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그분은 당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필리 2,7)라는 성경 말씀처럼 헤아릴 수 없는 겸손, 글자 그대로 지기 비움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미사의 ‘하느님 어린양’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하고 세 번 기도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사제로 하여금 그토록 위엄 있는 분 앞에서 죄를 의식하고 겸손하게 가슴을 치도록 규정한 이유를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기도는 우리에게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성경 말씀대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도 투신하라고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지 말고, 함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본보기, 말, 행동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을 죄로 이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경계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잘못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곳곳에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유혹에 빠뜨리는 모든 죄에 대해, 그리고 눈먼 사람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에 대해 우리 모두 함께 책임감을 느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어떤 날이든, 어떤 시간이든, 잘못을 저지르고, 실패하고,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빼놓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갈 때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즉 곤경, 질병, 슬픔과 같은 고통을 그리스도와 함께 속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말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자발적으로 대신하여 짊어지고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것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마음과 사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