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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71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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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1-25 16:28 조회1,4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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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느님은 가라지들을 함부로 제거하지 않으신다.

  

1.중요한 물음

‘하느님은 도대체 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가끔 새롭게 제기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이 전혀 필요하시지 않았는데도 세상을 창조하셨고, 게다가 세상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이며, 인간은 이 지상에 수백만 년 전부터 살았다고 한다. 인간이 존재하기까지는 실로 엄청난 발전단계를 거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이 그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세상과 인간이 당신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끊임없이 계속 돌보신다. 그분이 세상과 인간에게 손길을 계속 내미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어떤 위대한 것이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하느님만 알고 계신다. 세상에는 무언가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무르익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바로 그런 시간을 허용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인내다.

하느님은 그 위대한 것이 무르익어야 하는 이 세상을 우리 인간에게 맡기셨다. 세상을 잘 보호하고 지키며 돌보라고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가?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닌데도 세상을 마구 남용하고 착취하고 약탈하고 있지 않는가? 이로 인해 세상이 오염되고 황폐화되고 파괴되고 있지 않는가?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시급히 대책을 마련하여 실천해야 할 물음이다. 실제로 세상은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로마 8,22) 있다. 환경 파괴와 오염,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교란 등은 정치적인 주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은 상처입고 신음하는 세상만을 감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상처를 내는 우리 인간도 받아들이신다. 그분은 마치 불완전한 것들에도 가치가 깃들여 있음을 인정하시면서 줄곧 인내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실패와 악에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여기에서 하느님은 인내하시는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힘겹게 하는 모든 것을 감수하시는 분, 불합리한 것들을 견뎌내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 좋은 결말에 이를 것임을 확고하게 희망하시는 분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인내에 의해 지탱되고 유지된다. 이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에 다다른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1885-1968)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당신의 고요한 시선으로,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판단력으로 그리고 인간 자유에 대한 경외심으로 바라보셨다. 그분은 나의 변덕스런 모습을 무수히 인내하시며 지켜보셨다. 곧 나의 계획이 실패하여 다시 수립되었지만, 그것이 이내 또다시 포기되었던 모습들을 무수히 묵묵히 지켜보셨다.”

이상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아직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선하신 하느님이 이 세상의 악을 보시고도 어떻게 침묵하실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에서 이미 제기된 물음이다. 먼저 성경 본문을 보자.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2.집주인은 왜 반응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를 보면, 사람들은 좋은 씨가 어디서 생긴 것인지 잘 아는 반면 가라지는 어디서 생긴 것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선의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악의 출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이러한 무지는 사실 악의 본질과 그 함정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악은 - 그것이 크든 작든 –항상 어둠 속에서 활동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악은 특히 선의 활동이 잠잠해졌을 때 활동하기를 선호한다. 악의 음모가 항상 어둠 속에서 활발하게 위력을 떨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악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나아가 그 뿌리까지 제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한에서만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유에는 우리를 조금 안심시키는 내용도 있다. 그것은 종들이 좋은 씨가 열매를 맺도록 돌보는 가운데 가라지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르고 있었지만, 집주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하느님의 눈앞에는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를 시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귀를 심으신 분께서 듣지 못하신단 말이냐? 눈을 빚으신 분께서 보지 못하신단 말이냐?”(시편 94,9) 따라서 하느님은 악을 그 마지막 뿌리까지 환희 들여다보시기 때문에, 그분에 의해 악은 무기력해지고 결국 온전히 제압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종들은 악의 뿌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급해하며 악을 없애려고 골몰하는 반면, 집주인은 악의 기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평온함을 잃지 않고 인내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황하며 조급하지 않았던가? 잘 모르기 때문에 경거망동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집주인은 당황하지도 경거망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을 인내하며 악조차 그 자체로 의미를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주인은 종들과는 달리 가라지의 출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은 악의 본질을 너무 잘 아시고 또한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인내하시며 만인에게 자비로우시다.(지혜 11,23 참조)

‘가라지의 비유’의 메시지를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1904-1991)은 오래 전에 묘사한 적이 있다. 그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작가는 우선 독자들에게 스칸디나비아의 한 도시를 소개한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고요하게 조화를 이룬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파괴된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이 도시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건축물과 깨끗한 거리,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최상으로 갖추어져 있어 노숙자도 거지도 창녀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가톨릭교회는 크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개신교도 큰 영향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 도시의 자살률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이어서 작가 그린은 이탈리아 남부의 한 도시를 지목한다. 여기에는 파괴된 건물, 노숙인, 임대아파트 등을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발코니에서 돼지가 꿀꿀거리며, 도심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거지, 술에 취한 사람들, 소음, 창녀, 주택에서 들리는 소란, 가난, 미신 등을 자주 접할 수 있으며, 그런 가운데 길거리에서 성체행렬을 종종 볼 수 있고 어디에서나 성당을 찾을 수 있다. 삶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등 마치 선과 악이 뒤섞인 채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의 자살률은 극히 적다. 이처럼 작가가 두 도시를 소개하며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렇다. 사탄이 주도면밀하게 활동하는 곳에서는 선도 두드러지게 자란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이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 부패와 불완전에 대해 결코 흥분하지 마라. 그 이유는 첫째, 그대가 그대의 힘으로 악을 이 세상에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대는 그러한 조급함과 흥분 속에서 악이 그대 자신 안에서도 숨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3.하느님은 특히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인내하신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는 자유이다. 그 자유로 인간은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유는 완덕을 행해 성장할 수 있고 퇴보하여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인간은 실제로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지었다. 그리고 그 잘못과 죄악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죄에 대한 책임은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그 책임은 당사자가 활동하는 범위 안에서 곧 그 잘못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느님의 이런 방식을 아우구스티노는, 그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던 삶을 기억하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오 하느님, 당신은 온갖 고르지 못한 마음이 벌을 받게 하셨나이다.”(고백록 I. 12)  이런 시각은 그의 지배적인 사상이다. “해칠 수 없는 당신을 거슬러 악이 무엇을 할 수 있으리까? 오히려 자신을 거슬러 죄짓는 인간에게 당신은 갚음을 주시오니 사람들이 당신을 거슬러 죄지을 때라도 이는 곧 제 영혼을 망치는 일이 됩니다.”(고백록, III. 8) 그러니까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자유를 통하여 그분에게 맞서고 그분을 거스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느님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끝까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다.

여기에서 물음이 제기된다. 인간이 자유를 통해 하느님을 거스르며 자신을 해치는 불행에 이를 수 있다면, 그분은 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의 비유로 대답할 수 있다. 우리 삶에는 이른바 아주 내밀하고 은밀한 영역이 있다. 그 내밀함 때문에 인간이 완전히 행복하거나 완전히 불행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부부의 내밀한 공동생활을 들 수 있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부부의 그 내밀한 생활 안에서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안에서보다 더 불행할 수 있는 곳도 없다.

이러한 점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우리의 행복은 그야말로 최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우리 인간은 그분을 온전히 체험하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곧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를 단순히 실천하는 일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고 또 누린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하는 것이다. 그 결과 불행에 빠진다. 곧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멀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잃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최상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고 혹은 거부할 수 있다. 이때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우리의 행복이신 하느님을 향할 때 완전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