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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 사목교서 -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기쁨의 물결을 온 세상에

본문

 

형제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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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3일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해서 온 교회는 오랜 만에 기쁨, 행복, 희망의 물결 속으로 들어온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분이 교회의 수장 자리에 서게 된 일입니다. 그분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사람들이 땅 끝에까지 가서 찾아다가 로마의 주교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그분이 새 직무를 위한 수호성인으로 프란치스코를 택한 일에서부터 통상적 관념을 벗어나는 어떤 것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나타나 열린 창가에 서서 로마 시민과 세계인들을 향해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는 시간이 되었을 때, 이변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빌어달라며 몸을 깊게 굽힌 장면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신선한 바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대부분은 감지할 수도 없을 만큼 조용히, 불어오는 이 바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요한 23세께서 하셨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게 합시다.” 창문은 대부분 닫아 두지만 때로는 열어서 바깥바람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오래 닫혀 있으면, 방안 공기가 탁해지고 그 틈을 타서 곰팡이가 피고 각종 벌레가 서식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2013년 9월 27일 교리교육에 관한 국제 학술대회 참가자들에게, “창문을 활짝 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를 화두로 온 세상 교회가 새로운 각오로 이 일을 시작하는 이때에 교황님의 말씀은 가장 적절한 지침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교황님이 교리교사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자신도 교리교사라고 말씀하신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교리교사라는 말은 복음선포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연설문에서 ‘교리교사’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용례로 보면 사실상 복음의 ‘사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는 물론이고, 복음선포를 위해 사도로 불리운 평신도도 바로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새겨들어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2

사랑하는 교리교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앙의 해에 여러분들과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교리교육은 신앙교육의 기둥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좋은 교리교사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위해서 하시는 여러분의 봉사에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어려움이 있고, 일도 많고, 수고와 노력도 많이 들고, 원하는 결과가 바로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일 것입니다. 신앙을 가르치고 자라게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어린이들, 청소년들, 젊은이들, 성인들이 더욱 더 주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교육에서 가장 매력 있는 측면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건설합니다! 교리교사로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교사 “인”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교사로서 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가르치는 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교리교사로 일해.”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만일 당신이 교리교사 “이지” 않다면, 그 일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은 성공할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교리교사는 하나의 성소입니다. 바로 “교리교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리교사로서 일하는 것이 아닌, 소명, 즉 부르심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저는 교리교사로서 ‘일한다’고 말하지 않고, “교리교사로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전체가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증언을 통해서, 사람들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 16세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사람 끌어 모으기를 통해 성장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인간 내면을 움직이는 매력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매력을 행사하는 힘이 바로 증언입니다. 교리교사로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을 증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에 부합하게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과 삶, 증언을 통해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저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의 형제들에게 했던 말을 자주 기억합니다. “언제나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꼭 필요할 때, 말도 사용하십시오.” 증언은 삶 전체로 언제나 하는 것이고, 말은 특정한 시간에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보다는 증언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보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리교사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그분의 거룩한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커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상점에서 살 수 없습니다. 로마의 상점이라 해도 안 되지요. 그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 시작도 그분에게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교리교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또 저에게 말입니다. 저 역시 교리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저는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구식 예수회원들이 즐겨 하던 습관대로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저녁식사 때, 십자가 희생, 당신의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선물을 준비하시면서, 이점을 대단히 강조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이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어라. 우리가 그분에게 찰싹 붙어 있으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다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라! 이 말은 그분에게, 그분 안에, 그분을 향해 늘 말을 하면서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십시오!

1) 제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래야 하고, 우리 삶의 매 순간 그래야 합니다. 제가 먼저 있었던 교구에서 교육과정이 끝날 때 교리교사들이 “드디어 교리교사 자격증을 땄어!”하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아주 작은 여정을 마친 것뿐입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좋은 것을 가져다준다는 말입니까? 진실은 이것입니다. 교리교사라는 것은 벼슬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세입니다. 그분과 함께 머무십시오. 그러면 그 자세가 평생 갈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 머문다,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도록 자신을 내맡긴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님 앞에 머무십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찾아 뵐 때, 감실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나요? 아무 말도 없이....“하지만 저는 말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듣고... 그렇게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그분께 자신을 내 맡겨드리나요? 그분은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자체로 일종의 기도인 것이지요. 여러분은 주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시게 하시나요? 그 일을 어떻게 하시나요? 감실을 바라보고, 자신을 내맡겨 주님께서 바라보시도록 그냥 내버려 둔다....대단히 쉽습니다. “그러나 좀 따분하고, 바로 졸게 되는 군요.” 그렇다면 그냥 졸으십시오. 잠드세요! 그래도 그분은 당신을 바라보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확실히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 교리교사 자격증보다 이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교리교사로 존재한다는 것에는 이런 면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주님과 우정의 불이 지펴져서, 그분이 틀림없이 당신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아주 가까이 계시며,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지요. 여기 로마에서 어떤 곳에 미사를 드리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 젊은이가 가까이 오더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저에게는 신앙의 선물이 없거든요.” 그 젊은이는 신앙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앙의 선물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바라보실 수 있게 그냥 내버려 두어 보세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똑 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내맡겨 두세요.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특히 결혼해서 아이들이 많은 분들에게 더 그렇지요. 긴 침묵의 시간을 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답니다. 교회 안에는 성소가 다양한 만큼, 영성도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당신의 구체적 상황에 꼭 맞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각자의 신분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쯤해서, 여러분은 궁금하시겠지요. 저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일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여러분에게 화두로 남기고 싶은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고,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을 나는 어떻게 체험하고 있나? 침묵 속에서 그분 앞에 머물고, 그분이 나를 바라보실 수 있도록 내맡겨드릴 시간을 내가 찾아내는가? 그분의 불이 내 마음을 덥히도록 내가 자신을 내 맡기고 있는가? 하느님의 따뜻함, 사랑, 부드러움이 우리 마음속에 없다면, 우리처럼 가련한 죄인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덥혀줄 수 있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2) 두 번째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뒤로 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앞으로 나감으로써, 그분이 하신 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입니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인 면도 있지요. 왜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면, 우리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될수록, 그분이 당신 삶의 중심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만큼 더 당신을 자신에게서 나오게 만드시지요. 그래서 당신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열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의 역학적 흐름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신의 움직임입니다! 하느님은 중심이시지만, 언제나 자기-증여이며, 관계요, 상대방에게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분과 함께 머물면, 바로 우리가 그렇게 됩니다. 그분은 이런 사랑의 힘찬 흐름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진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여는 일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서 나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리교사가 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가고,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밖을 향해 나가도록 안에서 부추기시는 분은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교리교사의 심장은 그 특유의 수축과 확장 운동을 계속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교차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이며,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갑니다. 이 두 운동 가운데 어느 하나가 없으면, 심장은 더 이상 뛰지 못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지요. 교리교사의 심장은 케리그마의 선물을 먼저 받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합니다. “선물.” 단순하지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말입니까! 교리교사는 자신이 신앙이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선물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가 받은 것을 우리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행위가 아닙니다. 사업도 아닙니다. 순수한 선물입니다. 받은 선물을 주는 선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리교사의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선물 교환 한 가운데에 그 자리가 있습니다. 케리그마의 본질 자체가 그것입니다. 선물이 파견을 낳고, 그것이 우리를 자신에게서 나와 다른 사람들 향해 가도록 몰아부칩니다. 바오로 교리교사께서 말씀하시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한다”고. 그런데 우리를 “재촉한다” 혹은 “몰아부친다”는 말은 “우리를 소유한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시랑은 우리를 잡아당기고, 우리를 내 보냅니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가 하면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심장 박동이 이 오고 가는 운동을 표현합니다. 특히 교리교사의 심장이 그렇지요. 우리 모두 자문해 봅시다. 교리교사로서 내 심장을 박동하게 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인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그런 운동인가? 나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영양분을 길어 힘을 얻는가? 그렇게 해서 그분을 자신을 위해 감추어두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셔갈 수 있게 되는가? 솔직히 말해서, 교리교사가 어떻게 이런 흐름에 따라 힘 있게 움직이지 않고, 있는 자리에 그냥 서 있을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3) 세 번째 요인은 대략 이런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저 멀리 변두리로 나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저는 요나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지요. 지금처럼 변화무쌍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요나는 신심 깊은 사람입니다. 조용하고 질서가 잘 잡히고 가지런한 삶을 살았지요. 그러다 보니 그는 사물을 볼 때 늘 두부모 자르듯이 분명해야 했습니다.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에도 같은 기준을 갖다 댔지요.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진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사고는 경직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르셔서 이교도의 큰 도시 니느웨에 가 설교를 하라고 하시자, 속이 틀어졌습니다. “거기는 왜 간담? 진리는 여기에 있는데!” 그는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그가 편안함을 느끼는 범위를 한참 벗어난 곳에 있습니다. 그의 세계 저 밖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스페인으로 도망갈 요량이었습니다. 줄행랑을 쳐서 스페인 행 배에 탔지요. 가서 요나서를 한 번 다시 읽어 보세요. 그거 아주 짧습니다. 하지만 가르침은 큰 비유이지요.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지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무얼 가르쳐줍니까? 자기 엉덩이 체온이 묻어있는 곳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가 하느님을 따라가라고 일러주지요. 하느님은 늘 앞으로 밀어대시는 분이니까요. 전진 앞으로! 하지만 여러분, 아십니까? 하느님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거 정말 깨달으셨습니까? 그분은 겁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쪼잔한 방식보다 항상 더 크신 분이거든요. 하느님은 저 바깥 먼 곳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답니다. 당신이 거기로 나가면 그분을 거기에서 만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믿음직하고 창의력이 넘치는 분이시지요. 하지만, 창의적이지 않은 교리교사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요? 창의력은 교리교사로서의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요인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적이시고 어디에 유폐되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경직되거나 굳어져 있는 분이 아니시지요. 그분은 딱딱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반겨 주시지요. 믿음직하고 창조적인 존재가 되려면,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변한다! 내가 왜 변해야 합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할 곳의 상황이 바꿔졌고, 거기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 가까이 가서 거기에 머물려면, 우리는 어떻게 뛰쳐나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뛰쳐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리교사가 두려움에 두 손을 들어버리면, 그는 겁쟁이입니다. 교리교사가 거기에 안주하면, 그는 결국 박물관의 석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교리교사가 경직되어 있으면, 그는 말라비틀어지고 맙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겁쟁이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박물관의 석상이 되고 싶은 사람 있나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습니까? (교리 교사들이 합창하다시피, 아-뇨! 하고 대답하자) 정말입니까? 좋습니다. 이제 저는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데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그룹, 우리 단체, 우리 본당, 우리의 작은 세계에 갇혀 거기 안주해 있으면, 모든 갇혀있는 것에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방이 닫혀 있으면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슬기 시작하지요. 어떤 사람이 그런 방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병이 들고 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속한 모임, 본당, 단체에 갇혀 있으면, 그들은 병이 들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이 길거리로 나가고, 변두리로 뛰쳐가면, 그런 데에서 흔히 생기는 위험이 그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사고가 날 수 있지요. 길에서 사고가 나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에게는 병든 교회를 보느니, 여기저기 긁히고 상처 난 교회를 보는 것이 만 배나 더 좋습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모르는 것이 없지만, 늘 유폐되어 있는 교리교사보다, 밖으로 뛰쳐나갈 용기를 가진 교회, 교리교사가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습니다. 갇혀있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흔히 머리에 고장이 나 있지요.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밖에 나가서 멋대로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떠나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길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참된 교리교사 정신, 대담성을 갖추고 그분의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걸어주시고, 우리를 앞서 가시어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선수先手를 치시는 분입니다. 미리 손써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것도 같습니다. 성서에 보면 주님께서 “나는 아몬드 꽃과 같다”고 말씀하시지요. (역자 추가 : 한국에서라면 “나는 매화와 같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봄에 맨 처음 피는 꽃이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언제나 첫째이십니다. 이 점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앞장서 가십니다. 우리가 세상 끝까지 달려갈 생각을 하면, 우리는 겁이 좀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벌써 거기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의 심장 속에, 그들의 상처 난 몸속에, 그들의 어려움 속에, 그들의 불신앙 속에 계십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정말 찢어지게 하는 ‘세상 끝’에 관해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먼저 있었던 교구에서 보았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십자 성호도 긋지 못하는 어린이가 많습니다. 여기가 ‘세상 끝’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아이들에게 성호경 긋기를 가르쳐 주시기를 기다리시면서 거기에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먼저 거기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리교사 여러분, 저는 이 세 가지 점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언제나 새로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순례중인 하느님 백성, 교회의 한 부분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순례중인 하느님 백성을 동반하여 함께 걸어 주시는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뭅시다. 그리고 항상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분을 따라가고, 그분 사랑의 움직임을 본받읍시다. 사람들을 만나시기 위해 밖으로 나가시는 그분을 따라 갑시다. 앞으로 나가서 문을 엽시다. 복음 선포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용기를 가집시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축복해 주기를, 성모님께서 언제나 여러분 곁에 계셔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3

이 말씀에서 절절히 드러나듯이 새 교황님이 보시기에 오늘날, 교회는 다시 한 번 창문을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분은 교회를 대폭 수리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교회를 수리한다는 생각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입니다. 다미안 성당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내 허물어져가는 성전을 수축하여라.”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다미안 성당의 무너진 벽을 개보수 하다가 어느 날 성당에 불이 나서 타버리자,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 말씀의 깊은 뜻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8백 년의 세월이 지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도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 또 하나의 프란치스코가 다시 한 번 무너진 곳을 수축할 필요를 느끼십니다. 주님으로부터“내 허물어져가는 성전을 수축하여라” 하는 말씀을 받은 바로 그 성인을 새 직무에 따른 수호자로 선택한 것은, 그래서, 범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과연 이 분이 교회의 수장 자리에 취임하신 지가 별로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교회 안팎에 불고 있는 새로운 바람이 사람들을 크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 당장의 물질적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 ‘모든 생명체의 집’인 지구와 생태환경을 무참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핵분열을 기반으로 하는 무기와 발전소를 싸고도는 문제는 지구 자체를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갈 위험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고는 그 위험이 얼마나 무서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더 없이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여된 핵폭탄 보다 더 많은 양의 방사능 물질이 방출되었고, 그것이 유럽 전체와 아시아의 일부 국가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사망, 암, 기형아 출산 등으로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핵발전소 폭발 사건은 전 세계 인류가 매체를 통해서 그 가공할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도 안된 2011년 6월 독일 정부는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완전히 폐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013년 11월에는 아시아-태평양 비정부기구 환경회의가 전주에서 있었습니다. 일본 대표는 후쿠시마의 상황을 소개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진실을 감추는 정부의 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진실을 알면 아무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거짓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2013년 11월 1일 한 국회의원이 공개한 국무총리실 산하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우리나라 에너지 현실 및 정책 방향’자료에는 “원자력은 안전하지도 안정적이지도 값싸지도 않기 때문에” 장기적 대안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질서 있는 후퇴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위험 회피 비용을 감안하면 원전의 발전 단가가 20배 가량 높아진다는 사실까지 적시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정부나 관련기관에서 원자력이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값싸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것을 글자 그대로 뒤집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당국자들은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었고, 원자력은 거짓말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셈입니다. 엄청난 혈세를 쏟아 부은 4대간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이 몇 사람의 취향에 따라 이토록 허망하게 뒤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무엇이고 허위는 또 무엇인가? 예수께서“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 당대 최고의 권력을 대표하는 빌라도는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요한 18,38). 그에게 진리는 권력으로 짓누르고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국책연구기관이 내놓은 결론을 국정의 책임자들이 이제라도 솔직히 인정하고 실제 행동에 옮기기까지에는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그 먼 길을 가야 할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모범으로 삼으신 교황님의 말씀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새 교황님은 자신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의 인간, 평화의 인간, 피조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인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세상 만물이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태양을 형님, 달을 누님, 땅을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창조물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정신을 모범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창조물을 사랑해야만’ 자연은 물론이고 사람들 사이에도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가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연을 무참히 파괴하거나 핵 에너지를 바탕으로 물질생활 수준을 계속 높이려고만 들면 자연은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도 평화가 깨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난과 평화와 피조물 보호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가난의 정신을 받아들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고 물건을 아껴 쓰며 에너지를 절약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연을 사랑하고 보존하며 이웃과 후세를 참으로 사랑하는 길이 됩니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이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각별한 관심과 언행으로 해서, 가난한 이들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풍모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막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던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교회도 오랜 세월의 더께와 습관으로 굳어진 자신의 면면들을 프란치스코들의 눈으로 새롭게 돌아보며 복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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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새로운 눈으로 이제 보니, 경제성장만을 위해서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 사회의 큰 흐름 속에서 교회도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미사에 나온 교우들이 서로 간에는 이름도 성도 모른 채 하느님만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옆 사람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일 틈이 없이 집으로 돌아가곤 하는 일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때부터 산업화 이전에까지 지속되던 교회의 전통적 분위기에 비추어보면, 참으로 큰 차이를 느끼게 하는 현상입니다. 그 때의 한 예만 생각해 봅시다. 이제 얼마 후면 복자품에 오르시게 될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황일광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1757년 백정의 집안에서 태어나, 다블뤼 주교의 표현대로, 인도의 불가촉천민(파리아)보다 사회적으로 더 철저하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그분은 신앙인이 되어 신자공동체에 들어온 다음에는 늘 농담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으니, 하나는 나의 신분에는 너무나 과분한 대우를 해주는 이 땅에 있고, 또 하나는 후세에 있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든 상관없이, 교회는 언제나 이래야 하고 그것이 무너지면 그것은 이미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를 가장 큰 과제로 삼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우리 신앙인들뿐 아니라, 종교계 일반, 나아가 전 세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10월 한 언론사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 엄청난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저런 문제에 관한 그분의 말씀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사시는 분같이 보입니다. 그분의 믿을 수 없는 겸손,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과 마음속 깊이에서 하나가 되어 같이 아파하는 모습이 감동스럽습니다. 저는 그분이,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밀쳐내기보다 끌어안고, 단죄하기보다 그들 안에 있는 선을 찾아내려 애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인심은 언제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언자가 공간적으로 멀리, 시간적으로 과거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워(마태 23,29 참조) 칭송하기가 쉽습니다. 그의 말은 진리이며 우리가 가야할 당연한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내 동네, 내 고향에 함께 살고 있으면, 돌로 치고 죽이려 합니다(루가 13,34 참조). 사람들이 잘 못 가고 있는 것을 “들추어내기”(요한 7,7 참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등에처럼 오류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양심을 찔러 마음이 편치 못하게 합니다. 등에가 찌를 때 그 의미를 깨닫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참 삶으로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마음을 돌려야만 그리스도의 정신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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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눈을 교회 안으로 돌려, 아주 사소한 듯이 보이는 데에서도 복음의 빛에 비추어 무언가 잘 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감지해 내십니다. 2013년 10월 4일, 프란치스코 축일에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대성당에서 글라라 관상수도회 수녀님들에게 하신 말씀은 수도자들뿐 아니라, 교회에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띠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똑 같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저는 이 자리가 얼마 전에 우리가 가스텔 간돌포에서 두 번 만났던 때처럼 수녀님들 하고만 만나는 자리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제가 추기경님들을 여기서 몰아낼 용기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대로 진행합시다. 좋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를 환영해 주시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데 대해 큰 감사를 드립니다. 관상 수녀님이 주님께 자신의 삶을 몽땅 바칠 때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때 사람들은 보통 그 수녀님이 외로이 혼자 떨어져서 절대자, 하느님 하고만 상대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욕을 하고 죄를 아파하면서 고행의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 신앙인이나 그리스도교 관상 수도자가 걸어야 할 길은 전혀 아닙니다. 정말로 걸어야 할 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참회나 고행, 공동체 생활, 기도 그리고 보편지향청원 등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자리에 모시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다보면, 사람들이 보통 관상수도자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정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수도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관상), 기도하며, 그분과 함께 참회하는 길을 걸으면, 그는 대단히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 안에 갇혀서 사는 수도자들은, 어머니인 교회처럼, 대단한 인간성을 지닐 소명을 받았습니다. 삶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깊이 이해하고, 사람들이 겪고 사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고,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주님께 간청하고 매달려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간성. 여러분의 인간성은 이런 길을 걸어갑니다. 살을 지닌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제대로 가는지 아닌지를 알아 볼 수 있는 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기쁨, 기쁨입니다. 기쁨이 있으면 그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쁘지 않은 수녀님들을 보면 저는 슬픕니다. 그런 분들도 웃기는 하지만, 그 웃음은 비행기 승무원처럼 꾸며낸 웃음일 뿐입니다.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오는 기쁨의 웃음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오늘 저는 미사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십자가에 관해 말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바라보아야(관상) 할 것, 곧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 그분의 실재입니다. 그것은 추상적 관념이 아닙니다. 추상적 관념은 마음을 건조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그 상처들을 그대로 하늘로 가져가셨고, 지금도 그것들을 그대로 지니고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인간성의 길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이 가신 길을 걸어가십시오.

사람들이 수도원의 면회실에 가서 수녀님에게 자기들의 어려움을 늘어놓고 기도를 청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때 수녀님이 특별한 말씀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수녀님의 마음속에 들어온 말 한 마디는 상대방에게 더 할 수 없이 귀중한 빛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수녀님도 인간성이라는 분야에서 전문가의 길을 걷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너무 영적인 길이 아닙니다! 길들이 너무나 영적이면...여러분과 다른 수도원의 창립자인 데레사 성녀의 예가 생각납니다. 어떤 수녀가 데레사 원장님에게 와서 아주 영적인 일들을 잔뜩 늘어놓자... 데레사 원장님이 부엌 담당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수녀님에게 불고기 좀 해다 주세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함께 말입니다. 말씀이 살이 되셨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육체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위대하고, 아름답고, 어른스러우며, 인간적인 성덕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는 성덕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가 되십시오. 생명을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사제들이나 신학생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면 여러분은 그들과 어머니다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통해서 그들이 하느님 백성을 위해 좋은 목자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불고기 이야기를 잊지 마십시오! 대단히 중요합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 그분의 상처, 주님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중요한 점입니다. 부활 후에 주님께서는 그 상처를 지니고 계셨고, 그것을 그대로 천국에까지 가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공동생활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용서하고 서로 떠받쳐주십시오. 마귀란 놈은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해서 못할 짓이 없습니다. 그 놈이 말하지요.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입을 여는 순간 분열은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열만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이에 우정을 맺고, 가정생활을 증진시키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수도원이 연옥이 되게 하지 말고, 가정이 되게 하십시오. 문제는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늘 그렇듯이, 사랑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아보십시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사랑을 파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경쟁의식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가정과 같은 공동체 생활을 건설하십시오. 공동체 한 가운데에 바로 성령께서 계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바라보고, 항상 하느님이며 인간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넓은 마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십시오. 일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떠들어 대지 마십시오. 모든 일에 인내를 가지고, 마음속 깊이로부터 우러나는 미소를 지으십시오. 그 확실한 표지는 기쁨입니다. 참된 바라봄(관상)과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에서 오는 기쁨을 여러분에게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잊지 말고 기도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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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라는 정치학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유럽 2천 년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정치 조직은 대영제국과 로마 가톨릭이다.”그러면서 덧붙였답니다. “번성 일로에 있고 쑥쑥 뻗어가는 조직은 누구나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려움이 많고 줄어드는 조직을 낭떠러지에 빠지지 않게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최근 들어 교회가 대형 문제에 부딪쳐서 곤경에 빠져 있을 때, 115명의 추기경들이 단 이틀 만에 뜻밖의 인물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고, 신의 손길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내의 어떤 비신앙인 문필가는 칼 도이치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인도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한 눈을 고정시켜 놓고, 다른 눈으로는 세상 모든 어려움, 특히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기쁜 얼굴로’ 전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기쁨, 기쁨만이 복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표지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라면 자신이 먼저 그것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얼굴에 그것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복음 선포를 업으로 하는 목회자를 아버지로 해서 태어났으면서도, 바로 그 아버지의 실제 삶이나 얼굴 표정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여, 20세기 가장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니체의 말은 그리스도인, 특히 복음선포에 온 몸을 바친 이들에게 뼈아픈 울림을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네들이 입으로 전하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당신들의 얼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나는 하느님을 믿었을 것이요.”

모든 신앙인, 특히 복음을 위해서 한 몸을 바친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나는 과연 마음속 깊이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느끼는가?’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확실치 않으면, 만사 제쳐두고, 십자가 앞에 꿇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이 속에서 솟아날 때까지 죽기 살기로 거기 죽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채라면, 그가 하는 말은 복음의 증거가 되는 대신, 니체의 말대로, 반-증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지금은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1-22).

복음선포에 뛰어든 이들이 모두 이런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담대하게”(사도 9,27;9,28;13,46;14,39;18,26; 19,8;28,30; 에페 6,19;6,20; 2데살 2,2 등)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면, 그날 세상의 얼굴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이며 모든 복음선포자들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 교우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내가 말을 할 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고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전할 때에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시오"(에페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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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런 상황에서 세상의 상식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온갖 물질적 장비를 갖추어 주시는 대신, 주님께서는“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라”(루가 10,3)고 하심으로써, 복음선포자가 하느님 말고는 기댈 데가 철저히 아무것도 없게 해서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흔 두 제가가 굶어죽기는커녕 오히려“기쁨에 넘쳐 돌아왔다”(루가 10,17) )고 루가는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느끼신 일생일대의 가장 큰 기쁨에 관해서도 말합니다.“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루가 10,21). ‘성령을 가득히 받아 기쁨에 넘쳐서’, 글자 그대로는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는 표현은 복음서 전체에서도 여기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런 기쁨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 21).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왜 복음선포자들에게 가난을 그렇게나 강조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곧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이 큰 이유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궁극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분은 가난과 반대되는 태도, 곧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세상이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하는 세속정신을 살인자라고 규정하십니다. 그것은 영혼을 죽이고, 사람을 죽이며, 교회를 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 곧 물질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복음선포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고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 인도해야 할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선포자 자신이 물질에 매몰되어 영에 대한 감각을 잃고, 영혼이 죽어가며, 사람이 생기와 기쁨을 잃는다면, 결국 교회 자체가 시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대신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형국이 됩니다. 우리 주변 세계가 이런 방향으로 크게 기울어져가고 있는 마당에,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바오로 사도와 함께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을 가지고“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화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하고 외칠 수 있다면, 교회는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물질 없이도 존재하거나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사람이 영혼뿐 아니라 육체로도 구성되어 있듯이, 종교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제도는 일정한 공간, 건물, 인력 등 물질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질을 이용하는 대신 그것을 섬기며 그 노예가 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마음속 깊이 들어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성령의 도움 없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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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의 원형인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를 이상으로 내걸었습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10항, 13항 참조). 이제 루가 복음사가 제시하는 그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은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사도 2,42-47).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 공동체가 지닌 몇 가지 특성을 발견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이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초대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곧 예수님의 말씀과 이루신 일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것을 모든 활동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되니 교우들끼리 서로 도와주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음식을 나누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한 몸과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 : 사도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을 받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그분을 참으로 ‘믿게 된’ 사도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이어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요한 14,12-13).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인류 최초의 진정한 사회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사회문제가 생길 때마다 인류의 꿈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당시로서도 성전은 대단히 큰 규모였습니다. 신도들이 거기에 모여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이 활기를 띠고 본래의 뜻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었다는 것은 한 집에 들어갈 만큼 그 모임의 규모가 작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가 되었던 당시 대가족의 크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앙 가족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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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와 가정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현대에 인류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정의 파괴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부부, 부모 자식, 가족, 천척, 이웃, 사회, 국가, 인류로 점점 확대되는 인간관계에서 어느 단면을 떼어놓고 보아도 안정된 모습을 찾기가 힘들고 어디에서나 흔들리고 불안한 모습이 보이는 것은 이 모든 것의 바탕인 가족이 흔들리고 무너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만을 두고 보아도, 그 기본적 친교의 세포는 가정이며, 가정 안에 교회의 기본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려면 가정을 거울로 삼아 보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가정은.....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주어야 한다”(사목헌장 48항). 교회가 이런 특성을 잃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회 조직이나 이익집단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교회를 회복하고 그것을 복음화의 세포, ‘살아있는 돌’(1베드 2,4)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부부의 상호 증여에 바탕을 두고,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에게도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쏟아 붇는, 사랑의 공동체다운 모습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현대의 고질병인 사랑 결핍증, 외로움,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우울증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초대공동체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과 시도를 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여러 지역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정된 것이 '소공동체'입니다. 여기에서는 교우들이 옛날 식 대가족 규모로 모여,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참된 형제자매로서의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교회가 놀랍게 활기를 띠고, 주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10

이렇게 해서 하느님 백성 전체가 말씀과 형제애로 복음의 참 맛을 체험하면, 주님의 유언과 같은 당부가 먼저 신앙인 하나하나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복음선포의 사명을 맡겨 보내실 때, 기쁨의 원천인 당신께서 언제나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그것을 보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2013년 대림 제 첫 주일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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