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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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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복음: 루카 10,1-12.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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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6-30 08:55 조회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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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두 제자의 파견과 보고


“그 뒤 주께서 달리 일흔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루카 10,1).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과 그들의 보고에 대한 말씀이다.

“그 뒤 주께서 달리 일흔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루카 10,1).

다른 공관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에 대해서 나오는데 루카 복음 사가는 72제자의 파견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72’라는 숫자는 유다인들이 사용하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72’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성서에 나오는 ‘70’이라는 숫자를 알아야 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7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실 때 70인 장로들이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보았다는 고대 전승과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데 돕도록 야훼께서 영을 내려주신 장로들의 수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B.C. 3세기 중엽에 모세의 율법을 헬라어로 번역한 사람들의 숫자 역시 70인으로 되어 있고 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의원 수도 70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72’라는 숫자는 하나의 문학적 픽션으로 알려진 아리스테아스 서신에서 언급되는데 그가 율법을 번역하면서 히브리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여섯 명씩을 선정하였다고 한 데서 나온다.

성서에 ‘70’이라는 숫자(혹은 72)는 세상에 있던 나라의 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지상에 퍼진 세 인종’에서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계보가 70명(70인 역본은 72로 되어 있음)으로 나오고 있고, 이집트에 간 야곱의 집안 사람들 또한 요셉의 두 아들까지 합쳐 70명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일흔두 제자를 뽑아 파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려 하신 예시로 복음이 이방인 세계에 널리 퍼져 나갈 것임을 민수기의 서술 형식으로 루카 복음 사가가 표현한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루카 10,2-3).

성서에 하느님의 일꾼들은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언자들이었으며 그 원형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그들에게 하느님께 청하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파견해주시도록 청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파견된 자는 자기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 속으로 파견하시면서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그들의 운명을 예언하셨다. 마치 구약에 나오는 희생당한 어린양처럼 파견된 자의 원형이신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시면서 그들의 앞날을 걱정해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파견되어 가는 제자들에게 행동 강령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지 마라.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 그러나 어떤 동네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길거리에 나가서 ‘당신네 동네에서 묻은 발의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놓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만은 알아두시오’ 하고 일러주어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루카 10,4-1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파견된 자의 원형인 예언자들과 당신의 모습을 따르도록 하셨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란 보통의 인사말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포함된 말로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평화를 말한다. 즉,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고 의롭게 되는 평화이다. 파견된 자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따라서 파견된 자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그의 구체적인 행동과 삶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가난’이며, 따라서 파견된 자는 물질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음식으로 만족하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가난 역시 개인적인 덕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구원의 선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징표이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인간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에 마음을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또한 파견된 자들은 우상숭배와 같은 세속적이고 부정적인 것에 물들어서는 안 되며 그들과 타협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따르는 부정적 요인들을 상징하는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라고 하셨다. 또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경고의 말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날이 돌아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잠시 소돔 땅에 대해서 알아보자. 소돔(Sodom) 땅은 특히 사악한 땅으로 고모라(Gomorrah)와 함께 하느님의 징벌로 멸망한 땅이며, 그 후 하느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징벌의 경고로 자주 거론되는 땅이다. 소돔은 당시 ‘계곡의 도시들’ 중의 하나로 아직까지 그 계곡의 도시들 흔적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 위치를 현재 사해 남단의 물에 잠긴 지역일 것이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창세기 14장 3절의 ‘시띰 골짜기’라는 말은 그 계곡이 사해의 물에 잠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에는 소돔과 주변 도시의 멸망에 대해서 이렇게 나온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전에 야훼와 함께 섰던 자리에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분지 일대를 굽어보니 그 땅에서는 연기만 치솟고 있었다. 마치 아궁이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창세 19,27-28).

소돔과 계곡의 다른 도시들의 멸망은 흘러나온 석유와 천연가스가 점화되어 야기된 대 화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성서에 “야훼께서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으시어 거기에 있는 도시들과 사람과 땅에 돋아난 푸성귀까지 모조리 태워 버리셨다”(창세 19,24-25)로 보아 대 화재는 번갯불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이유로 지질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그 근방에 석유(가스 및 역청의 분출)의 흔적이 많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소돔과 계곡의 도시들의 멸망과 같이하여 아브라함이 살았던 때를 추정하는데 B.C. 1900년경, 혹은 말엽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수세기 동안에 걸친 염산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뾰족한 소금 기둥들이 생겨났는데, 고대 및 근대 작가들은 그것을 롯의 아내로 비유했다. ‘소금 기둥’으로 변한 롯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 형상을 닮은 한 소금 기둥의 자연적인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소돔이 이 소금 산 근처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생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소돔과 고모라의 참혹한 멸망은 하느님을 거역한 타락한 도시와 사람들의 징벌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복음은 이어서 파견된 자들의 보고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일흔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예수께서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10,17-20).

마귀란 악령을 말하는 것인데 하느님과 인간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나해-연중 제4주일 참조)이다. 이들을 복종시켰다는 것은 신적 능력을 말한다. 제자들은 마귀들을 복종시킨 것에 대해서 감화되어 의기충천했다. 제자들은 하느님에 의해 파견된 자들임을 잊고 자기들이 마귀를 쫓아낸 것에 더 큰 기쁨을 가졌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낸 행위보다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시면서 조용한 깨우침을 주셨다. 파견된 자(가해-연중 제11주일 참조)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에 대해서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도구요 종들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야훼의 종’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파견된 자들은 오직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72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파견된 자들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셨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파견된 자는 항상 기도하면서 겸손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