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복음: 루카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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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7-07 09:13 조회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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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율법 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10,29).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은 민족과 동족의 한계를 벗어나 모두가 우리의 이웃임을 전하고자 하신다.
그러면 먼저 오늘 복음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자.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성전에서 일어난 일이다. 배경에 대한 유사한 내용이 마태오 복음서(가해-연중 제30주일 참조)와 마르코 복음서(나해-연중 제31주일 참조)에도 나타나는데 특히 루카 복음 사가는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질문을 하면서부터 시작하여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전개 시키고 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10,25-29).
이 율법 교사는 상당한 지식과 지위가 있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는 이미 이론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구약의 율법에 보면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신명 6,4-6).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너희는 내가 정해주는 이 규정을 지켜야 한다”(레위 19,18-19)라고 가르치고 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자신의 지식을 뽐내면서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질문한다. ‘이웃’의 범위를 예수님께 물은 것이다. 율법 교사는 율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웃’의 범위를 자기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에 율법주의가 그러하였듯이 이웃을 같은 핏줄이나 동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의 성서적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자. 엄밀하게 말해서 이웃이란 단어는 출생과 관계되어 있는 형제를 뜻하는 말은 아니다. 이웃은 곧 타인을 말한다. ‘이웃’이란 개념을 보면 히브리어 ‘레아’(친구, 동료)에서 유래하였으며, 그리스어 ‘플레시온’(근처에 있는 사람, 이웃 사람)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이웃’은 일반적으로 타인이라는 개념보다는 계약으로 맺어진 백성, 동족을 지칭하였다. 즉 형제와 같은 유사한 동족의 개념으로 이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강한 의식과 함께 이스라엘 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구별하지 않고 이웃으로 포함시켰다. 이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체류하고 있는 이방인에게도 사랑의 계명을 확대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율법 정신은 같은 종교나 동족에게만 한계를 두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넓게 같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시키려고 한 것이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배 생활 이후 70인역 성서는 히브리어 레아를 그리스어 플레시온으로 번역하여 사용하면서 ‘형제’나 ‘동족’을 다 같이 ‘이웃’으로 바꾸어 부른다. 이제 이웃이란 개념은 동족이나 형제에 한계를 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의 ‘이웃’이 되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율법주의는 “누구든지 동족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빚을 삭쳐주어야 한다. 동족에게서 빚을 받아내려고 하면 안 된다”(신명 15,2)는 법령을 들어 같은 동족에게만 이웃의 개념을 적용시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하였다. 이 율법 교사 역시 당시의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백성인 동족만을 이웃으로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이웃의 범위를 묻고 있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신 것에 대한 트집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개념을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율법 정신을 살려 이스라엘 동족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확대시키셨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써 이웃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10,30-37).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웃에 대한 배타적이고 편협한 생각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차례로 죽어 가는 사람을 지나쳐 갔다. 그들은 누구도 상처 입은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를 돕고자 멈춘 사람은 유다인도 아니고, 외적으로 윤리와 종교에도 관심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느냐?”하고 물으시자,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사랑의 실천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대답을 통하여 진정으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구원이 죽어 가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암시하셨다.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인가? 사마리아 사람의 기원에 대해서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사마리아 성읍들에 이주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자리 잡고 살게 하였다”(2열왕 17,24).
아시리아왕 사르곤 2세는 B.C. 722년에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브라임과 므나쎄 지파라고 함)을 모두 추방하고 다른 외국인들을 정착시켰다(다해-연중 제13주일 참조). 그리고 바빌론 유배 이후 모든 유다인(이스라엘인)들이 귀향했을 때 이미 사마리아에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던 터라 유다인들만의 순수한 종교와 전통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종교와 우상숭배에 동화되어 버렸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종교는 오랜 세월 동안 모슬렘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의 것을 모방하였고, 우상숭배와의 괴상한 종교 혼합주의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연유로 순수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여 ‘구다 사람들’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을 유다인(이스라엘) 가문의 자손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에 살면서도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당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시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며 B.C. 722년 국외로 추방당한 것은 전체가 아니었고, 추방자들 역시 55년이 지난 후에 본국으로 모두 귀향했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원주민 유다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산골길을 떠날 때 그리짐(Gerizim) 산 가까이 있는 모래 상수리나무(창세 12,6) 곁에서 장막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사악을 희생시킬 준비를 한 곳이 그리짐 산이었다고 하면서 멀지 않은 사웨 골짜기에서 멜기세덱을 만났다고 주장하였다(창세 14,17 이하). 또한 야곱이 꿈을 꾼 자리가 이 산 꼭대기 길벳 라우제였다(창세 28,10 이하)고 주장하면서 해마다 이 산에서 오순절 풍습에 맞추어 과월절을 지냈다. 하여튼 사마리아 사람들은 외국에서 이주한 이방인들과 혼합되어 정통 이스라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성서에서 ‘이웃’이라는 개념은 어떤 특정인으로 범위를 정해 놓은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셨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르침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다 이웃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신심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무관심 속에 버려진 형제들을 받아들이면서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 헌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상처 입은 인류와 동일시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신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