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복음: 루카 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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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7-25 09:04 조회1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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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오늘은 연중 제18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탐욕을 부리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자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하시고는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루카 12,13-15).
어떤 사람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 중재를 요청하면서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판관들처럼 사회정의를 세워주시는 판관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사람은 정의를 내세워 재산의 공평한 분배를 예수님께 인정받으려 하지만 그는 재산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자주 이익과 관련해서 우리의 일에 하느님을 끌어들이려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물질적 풍요로움에 있지 않고 하느님 자녀로서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는 데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탐욕 때문에 자신을 잃는 일이 없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깊은 배려를 볼 수 있다.
탐욕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풀레오넥시아(Pleonexia, 더 많이 가지다, 탐식하다)와 일치한다. 탐욕은 종종 먹는 것과 마실 것과 입는 것을 지나치게 갈망하거나 물질을 탐하는 것을 말한다. 재물이든지, 먹고 마시는 것이든지 간에 그러한 열망은 이성을 넘는 것으로 일종의 우둔한 이기심이다. 탐욕은 신·구약성서에서 모두 중한 죄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탐욕이 자신이나 이웃에게 끼치는 해악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탐욕은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그리스도인 감독관이나 성직자들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탐욕을 이스라엘이 쇠퇴하여 바빌론에 정복당하는 주된 원인으로 간주했다.
70인역 성서와 신약성서에서 탐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또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보다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탐욕의 특성을 이웃 사랑, 즉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고 재물과 금전 따위의 물질적 재화를 끝까지 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서는 그리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탐욕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악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이교도들과는 달리 아주 넓은 의미의 욕심에서부터 종교적인 본질까지 통찰하고 있다. 그래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뿐만 아니라 계약의 하느님을 모독하며 우상숭배 행위를 조장하는 것도 탐욕으로 여겼다.
구약성서에서 탐욕은 이웃에 대한 사랑, 특별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율법은 이 같은 탐욕자들로 부터 가난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한다면 야훼께서 “가난한 사람이 있거든 인색한 마음으로 못 본 체하지 마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마음이 메마른 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멸시한다고 경고하였다. 특히 지도자에게 있어서 탐욕은 자신의 이익에만 마음이 쏠려 ‘짐승을 잡아 찢는 늑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쌓고,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폭력까지 쓴다고 말하였다.
신약성서에서는 탐욕에 대한 가르침을 세 가지 중요한 관점에서 가르쳤다. 첫째로 탐욕의 정반대인 아가페의 사랑을 계시하였고, 둘째는 탐욕 속에 우상숭배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음을 폭로함으로써 탐욕의 사악한 면을 보여주었다. 끝으로 지상 재물의 가치를 헛되게 만드는 미래의 삶을 제시함으로써 탐욕의 어리석음을 밝혀 냈다.
복음서는 탐욕이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쓰신 부분을 보면 마르코 복음 7장 22절에서 악의 내적 원천이 되는 죄들 중의 하나로 이를 말씀하셨고, 오늘 복음인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는 구절에서 이를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탐욕에서 오는 악행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유산상속에 관한 싸움을 중재하실 것을 거부하시면서 내일도 자기의 것인 양 만족하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를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부리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셨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루카 12,16-21).
재산은 하느님을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 탐욕을 부려 부족한 창고에 재산을 쌓아 두면서까지 제아무리 재산을 모아 본들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죽음뿐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전도 2,21).
세상살이는 헛되고 헛된 것, 세상만사가 다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죽음 앞에서 인간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지라도 사물을 보는 눈과 마음만은 달라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날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모든 탐욕을 버리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 그리고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골로 3,5.9).
바오로 사도가 탐욕에 대해서 특히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성서가 탐욕을 우상숭배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예수님의 교훈을 계승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만 향해야 할 마음을 세상에 향함으로써,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을 경시하고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뜻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1서 6장 10절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탐욕을 부려 거짓 신을 택함으로써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린 배신자 유다처럼 탐욕스러운 인간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의 운명을 멸망에로 이끈다.
소멸되는 현세의 재물은 미래의 생명에 비교하면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탐욕스러운 자의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원하고 있지만 지상의 재물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 때에 참생명을 얻게 된다.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탐욕을 부리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재물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지도자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