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복음: 루카 1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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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8-18 08:55 조회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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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a).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동네와 마을에 들러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카 13,22-24).
예수님께서 들리신 마을의 사람들은 쉽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성을 체험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이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은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두고 한 질문이었지만 한편으로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구원을 목표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에서의 탈락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실 구원의 문은 의인들에게는 열려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좁고 닫혀 있어 그곳에 들어가려면 마지막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구원이란 결코 쉽지 않은 것 같다.
‘구원’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 ‘구원하다’, ‘구원자’라는 어휘는 성서를 통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그중에서도 ‘구원하다’라는 동사형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구약성서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 혹은 ‘해방하다’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여러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서 보호, 해방, 대속, 치유 등의 관념으로 생각하였고, 그 위험에서 구출되는 구원을 승리, 생명, 평화 등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구원은 예수님에게서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 즉 부활이다.
사실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의 상이한 방법으로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거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구원의 사실을 선포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즉 하느님께서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멸망으로부터 실제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어질 구원의 ‘예시’ 혹은 ‘유형’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약 성서와 구약성서의 공통된 주제이다.
하느님은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은 유다교 신앙의 복음인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복음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고, 또한 당신의 자녀들을 멸망(원죄로 인하여 죽음의 세계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현실인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종말론적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시대를 초월한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는 예시이지만 이미 구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험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 기적을 행하시어 벗어나게 하시거나,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어 이끌어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심으로써 구원의 절정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최대의 역사적 체험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하느님께서는 홍수 때 노아의 가족을 구출하셨고, 롯의 생명을 구하셨으며, 요셉을 통해 야곱의 아들들을 구원하셨다. 또한 기드온과 삼손과 사무엘과 사울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해주셨듯이 다윗을 통해서도 당신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위험한 고비 때마다 야훼께 의지하여 구원되기를 바랐으며, 바라던 구원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외에 구세주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구원의 업적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구세주’라 부르고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근본적인 신념으로 하느님께서 구원해주신 과거의 업적을 회고했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 힘을 자랑삼아 교만한 자만심을 품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모든 구원, 즉 의인이 구원되는 것도 야훼의 업적이었으며 그분의 은총이었다. 그리고 시편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종들을 나열하였는데 ‘의인, 가난한 사람, 겸손한 자, 작은 이, 박해받는 사람, 마음이 올바른 이, 불행에 처해 있는 사람 등’ 한마디로 겸손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하느님의 업적을 보면 세상 종말에 어떤 법칙에 따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 예로 홍수 때 노아의 가족들만 구출된 것은 ‘작은 무리’만 구원된다는 것을 암시하였으며,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인들과 죄인들을 갈라놓는 하느님의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처럼 구원의 체험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남은 무리’에 더욱 깊이 의식되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오기 전에 하느님의 심판이 이 지상에서 먼저 행해져 소수의 의인들만 구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마지막 날’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해서 몇 가지를 설명하였다. 종말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것과 또한 당신 백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경계선을 넘어 전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문을 제대로 찾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의 문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은 그 길이 좁고 험하고 고통스러운 길로서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이다. 즉 사람들에게 많은 비웃음과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바른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무엇보다도 먼저 의미심장한 몇 가지 행동으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계시하셨다.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셨으며, 물위를 걸어오던 베드로를 구하셨고, 폭풍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구원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높은 의미의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 죄 많은 여자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그를 구원하셨고, 통회하고 뉘우치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내리셨다. 따라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신앙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믿고 따라야 한다.
구원은 예수님의 목표였다. 그분은 세상을 단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멸망할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셨다. 그분이 진리를 말씀하시는 이유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문이시고, 길이시며, 그분을 통해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구원에는 조건이 따른다. 구원의 기회를 포착하지 않고 놓치는 자는 당장 멸망할 위험에 처하게 되며 다시는 구원의 길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기에 회개해야 한다. 또한 구원된 자들의 무리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끝까지 구원의 길에 항구해야 한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의무가 너무나도 큰 것이었기 때문에 “누가 과연 구원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구원에서 탈락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해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너희만 밖에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25-30).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질 어두운 수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이려 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함께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시고 구원에 대한 긴박한 말씀을 하시면서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하셨다.
구원의 문은 이스라엘을 떠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지는 알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구원의 문은 좁고, 또한 그 문이 곧 닫혀질 때가 올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한다.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