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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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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복음: 루카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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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0-21 08:47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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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루카 18,14a).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에 이어 기도할 때 하느님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함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복음은 자기 정의를 나타내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태도와 그들이 매우 멸시했던 세리의 기도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의 두 극단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정반대의 영적 태도를 풍자적으로 보여 주고자 하신다.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보다는 자신을 더 의식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이 세심하게 지키고 있는 종교적인 실천들에 젖어 도취되고 있을 뿐,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기도는 아무 효과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반면에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의식에 압도된 세리는 오직 하느님께 자비만을 간구할 뿐이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희망하면서 감사도 드리지 못하고 그저 자기 죄만 고백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다 마치시고 나서 “하느님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라고 결론 지으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가해-연중 제31주일 참조)이란 마카베오 반란 직후 나타난 종교 집단으로 주로 학자들과 경건한 신자들로 구성된 사람들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원로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신약성서에 군중의 대변자로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의 대중적 지지를 크게 받았다. 그들은 율법에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율법을 준수하고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데 열성을 다하는 것을 보시고 감탄하셨으며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율법의 준수에 대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여 접촉하기를 원하는 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정의를 내세워 교만하였고 가난하고 불쌍한 서민들을 업신여겼으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예를 들어 세리와 창녀들을 죄인들이라 하여 아예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셨으며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하셨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에서 자기 정의를 내세워 하느님 앞에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그들의 오만함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과 비교할 때 세리는 그저 죄인일 뿐이었다. 그는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낼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그저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길 뿐이었다.

잠시 세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신약 시대에 로마 관리들은 인두세와 지세 같은 세금을 정기적으로 징수하였다. 그래서 로마 관리들과 세금 청부인들은 실제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서 유다인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했는데 신약성서에 나오는 세리들은 이러한 하수인들을 말한다. 당시에 유다인들은 로마 통치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점령군에 의해 탄압받는 백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세금 내는 행위 같은 억압에 대해서 하느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였다. 그리고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런데다가 로마 관리들과 세금 징수 청부업자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짜내면서 착복했다. 이로 인해 하수인으로 일하는 유다인 세리들은 유다인 동족으로부터 더욱 천시되고 멸시를 받았으며, 이들은 결과적으로 민족의 배반자가 되었고 문자 그대로 민족을 강탈하는 자들이 되었다. 랍비 자료에서도 세리들을 언제나 강탈자로 몰아세웠다. 따라서 유다인 사회에서 세리들과 그 가족들은 유다인들의 자치적인 직무를 담당할 권리를 잃었고 심지어는 유다인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유다인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노상강도를 속여도 되듯이 세리들을 속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공관 복음서는 세리에 대해서 이같은 초기 랍비 자료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랍비 자료에서 ‘강도와 세리’를 함께 취급하는 것처럼 복음서에서도 ‘세리와 죄인들’이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해 언급하고 있다. 당시에 세리들은 도덕성을 무시하는 범죄자로서 창기와 마찬가지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리의 무리와 함께 기꺼이 식사를 나누신 것은 곧 이들의 행위를 묵인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들을 동정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들 자신을 극복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시려는 뜻이었다. 이는 세리들에게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권고이기도 하셨다.

랍비들은 세리들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보았지만 그들이 회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강탈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완전한 보상을 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부 세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았다.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세관장 ‘자캐오’는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갚아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라고 회개하면서 새로운 삶을 약속하였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는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복음 사가에 의해서 바리사이파 사람의 이기주의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바리사이파 사람의 교만함을 책망하면서 세리와 같은 죄인의 삶에 밝은 희망을 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따라서 오늘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하는 세리의 기도에서 참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불가능하다고 하는 세리의 회개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은총이다.

자기 스스로 깨끗하다고 믿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나 세리는 겸손한 기도로 용서를 받았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리의 태도를 본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겸손한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그의 간청은 하늘에 다다를 것이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집회 35,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