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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복음: 마태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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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9-07 08:44 조회234회 댓글0건

본문

 

형제를 용서하여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2).

 

오늘은 연중 제24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 형제에 대한 용서이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 대해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22).

지난주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18) 하시면서 형제에 대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데 제한을 두고 싶어 했다. 베드로는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데 일곱 번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고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는 베드로에게는 아주 대단한 너그러움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장 후하게 세 번까지 용서해주는 통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함을 뜻하는 숫자였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는 데 일곱 번이면 충분한 사랑의 배려로, 그리고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사랑의 실천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말씀으로 숫자적인 제한을 무시하신다. 형제를 용서하는 데 있어서 제한적인 용서가 아니라 끝없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란 숫자 개념을 떠나서 가장 완전한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기 때문에 여기에다가 일흔 번을 곱한다는 것은 가장 완전함을 뜻한다. 가장 완전한 용서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성서에서 용서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행위를 말한다. 하느님께 대한 거역이나 죄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어 화해와 친교의 길을 여시는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용서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신앙적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용서가 이차적으로 이웃에 대한 인간의 용서를 말하기도 한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용서가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용서를 본받아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니 우리는 당연히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에 대한 용서는 이미 집회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집회 28,2-4)

집회서는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곧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임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형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해줌으로써 자신은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죄의 용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용서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더 큰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형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해주신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그에게는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3-35).

화폐 가치로 ‘달란트와 데나리온’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1달란트는 6천 드라코마였다고 한다. 1드라코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과 같은 값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드라코마와 데나리온은 같은 단위로서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며, 이는 노동자가 6천 일을 일해야 받게 되는 품삯이었다. 그러면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되겠는가?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가 6천만 일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 액수이다. 그런데 그 종은 6천만 데나리온을 탕감받고서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자기 동료의 빚은 탕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다. 우리는 ‘무자비한 종’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죄를 용서받고 있으면서도 형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기심과 탐욕에서 오는 무자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형제들을 진심으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거듭되는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신 분 역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해주어야 한다. 베드로의 질문처럼 일곱 번이라는 숫자적인 제한을 두지 말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형제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