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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복음: 마태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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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9-14 08:51 조회2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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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일꾼과 품삯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마태 20,1-2).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 미사를 이동해서 드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9월 20일이 한국 순교자 대축일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앞당겨 주일에 경축하기 때문이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시작된 한국 교회는 1801년 신유 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 대 박해 때까지 1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묵상하면서, 연중 제25주일인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낸다.

오늘 연중 제25주일 복음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로 ‘포도원 일꾼과 품삯’이라는 말씀이다. 먼저 포도나무에 대한 역사와 성서적 의미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반 유목민으로 살다가 약속의 땅으로 건너온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곡식과 포도를 경작하는 농민들이 되었다. 따라서 포도나무 재배와 포도 수확은 이스라엘의 삶의 한 부분이었고, 생활의 한 영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성서에 보면 포도나무와 포도밭에 대한 비유가 대단히 풍부하게 나온다. 

구약에서 ‘포도나무와 포도밭’은 종종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비유들을 보면 “야훼께서는 한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가져다가 심으셨다”(시편 80,8-13), “이스라엘은 선택된 포도나무였으나 들포도나무가 되었다”(예레 2,21), 포도나무의 가지가 단지 땔감으로서만 쓸모가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거민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에제 15장)라는 말씀이 있고, 또한 야훼를 경외하는 사람의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같이 될 것이라는 말씀도 있다(시편 128,3).

신약에서 와서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말씀하실 때 종종 포도나무와 포도원을 언급하셨는데 이어지는 주일 복음에서처럼 하늘나라에 대해서 ‘포도원 일꾼과 품삯’,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가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당신이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그 농부’로 묘사하고 있으시다는 점이다(요한 15,1-11).

그러면 잠시 포도나무에 대해서 알아보자. 포도나무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팔레스티나(이스라엘)의 가장 특색이 있는 나무들 중의 하나였다. 요담의 우화(판관 9,8-13)에는 이 세 나무가 나란히 언급되고 있으며 성서의 어느 곳에서나 이 나무들은 땅의 열매를 상징하였다. 따라서 성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포도원은 그들의 유일한 재정적 근거였다. 

포도나무에 대한 히브리어 일상용어는 게펜(gepen)이고, 헬라어는 암펠로스(ampelos)이다. 이 두 단어들은 주로 포도나무를 의미하고 있지만 때로는 포도가 아닌 다른 덩굴식물을 의미하면서 오이, 참외, 수박(민수 11,5)과 들포도 덩굴(2열왕 4,39)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통 의미하는 것은 포도원이지만 일반적으로 정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포도나무에 대한 성서의 기원을 보면 노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창세 9,20). 포도 재배가 문명의 기원에까지 소급되며, 포도나무는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포도 재배가 농경의 가장 오래된 형태 중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오늘 복음인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살펴보자.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서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1-16).

복음에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일꾼들에게 지급하는 품삯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품삯과 다른 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온 사람이나,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품삯으로 지급되고 있다. 이러한 품삯은 분배 정의에 따라 정상적으로 지급되는 품삯이 아니다. 마땅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사회 정의이다.

그러면 잠시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노동자의 품삯에 대해서 살펴보자.‘품’이라는 말은 일하는 데 드는 힘이나 수고를 말한다. 그리고 ‘품삯’이란 노동자가 품을 판 값을 받는 삯으로 일꾼이 힘들여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받는 노동 임금을 말한다. 따라서 일꾼이 일한 만큼 품삯을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권리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보면 각종 보호법을 말하면서 품삯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날을 넘기지 않고 해지기 전에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한 자라 그 품삯을 목마르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너희를 원망하며 외치는 소리가 야훼께 들려 너희에게 죄가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신명 24,15).

일한 사람의 품삯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 또한 일한 사람은 보통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날을 넘기지 말고 해지기 전에 반드시 품삯을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한 만큼 품삯을 받는 것은 율법이 정한 정당한 노동법이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이 하는 말은 일꾼들과 달랐다. 포도원 주인은 따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하고 말한다. 처음부터 정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자기 품삯이나 받아가라고 말한다. 포도원 주인과 계약한 대로라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같이 일한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비교한다면 무언가 맞지가 않다.

복음에서 지급되고 있는 품삯은 하늘나라의 품삯이다. 우리의 논리와 원칙으로 이해할 수 있는 품삯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에게 시간에 관계 없이 품삯을 주시고자 하신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일꾼들은 다른 형제들이 받는 품삯에 대해서 이기심이나 질투심을 가지고 투덜거리면서 따져서는 안 된다.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의 품삯을 받는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의 품삯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품삯인 영원한 생명은 더 받고 덜 받는 그러한 삯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하늘나라의 품삯은 먼저 왔다고 해서 더 많이 받고, 늦게 왔다고 해서 덜 받는 품삯이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신비의 나라이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8-9).

하늘나라의 품삯인 영원한 생명은 오랜 시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살고 충실했느냐에 따라서 주어진다.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 왔던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의 이야기인 것을 알아듣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러나 오늘 복음 이야기는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