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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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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일(마르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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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0-28 08:52 조회376회 댓글0건

본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30).

 

오늘은 연중 제31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째 가는 계명과 둘째 가는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새롭게 가르쳐주신다.

복음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과월절-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일어난 일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군중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심한 논쟁과 토론을 벌이셨다. 이로 인해 그들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고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를 궁리하면서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올가미를 씌우려 하였다.이러한 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계명에 대한 질문을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질문했다(가해-연중 제30주일)고 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토론하실 때에 답변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한 사람이 물었다고 하고 있다. 하여튼 계명에 대한 그의 질문은 매우 민감한 문제로 자칫 율법 논쟁에 말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계명은 곧 율법이다. 율법에는 지켜야 할 법령들이 많이 있고, 이들 법령들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명들이었다. 모든 계명들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첫째 가는 계명인가,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은 그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관심거리였으며 당시에 그들에게 그러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한 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하느님의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첫째 가는 계명인지 예수님께 물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께서는 첫째 가는 계명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신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신명기에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법령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신명기 법령은 이렇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신명 6,4-6).

구약에 있어서 하느님의 계명은 이스라엘이 구원의 도래를 준비하는 동안 종교생활을 지배했던 중심 요소였다. 이 계명은 모두가 모세오경 안에 담겨져 있으며, 모세오경은 여러 차례 수정되기도 하고, 시대의 요청에 적응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보완되기도 하면서 완성되어졌다. 따라서 십계명(출애 20,1-17)과 계약의 법전(출애 20,22-23)은 신명기에 의해 다시 취급되고 확대되었으며, 첫째 가는 계명은 야훼께 대한 사랑으로, 다른 모든 계명은 여기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명기 법령은 히브리인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씩 암송하는 기도의 중심 부분이었으며, 바빌론 유배 이후에는 여러 법령 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즉 히브리인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나라를 잃고 유배를 당한 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뒤에는 그들이 암송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형식과 위선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이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첫째 계명임을 상기시켜 주신다. 이 말씀은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그들의 신앙에 경각심을 주시는 단호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단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둘째 가는 계명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레위 19,18) 하는 율법의 법령을 들러내시어 두 번째 계명으로 선포하신다. 율법은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이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보다는 덜 장엄하고, 이웃이란 말도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율법은 옛날부터 '이웃'에 대한 관심을 계명으로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에 있어서도 벌써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나 적의를 하느님께 대한 죄로 인정하고 있었다(창세 3,12; 4,9). 율법은 하느님께 대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를 서로 연관시키고 있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 주시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도 한때는 에집트 땅에서 떠돌이 신세였으니, 너희도 또한 떠도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10,18-19)라는 권고가 보여주고 있듯이, 이웃 사랑의 계명은 에집트 탈출시에 야훼께서 하신 일의 기초가 되고 있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서 구세사 안에서 행하신 모범에 의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계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른 여러 계명들과 같은 서열에 두어 등한시하고 묻어 두었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위선과 겉꾸밈으로 전통과 관습, 안식일 법과 같은, 보이기 위한 법의 준수로 그들의 그릇된 생활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같은 중요한 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상기시키시면서 둘째 가는 계명으로 올려놓으신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모든 계명의 중심적 위치, 나아가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볼 때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이 두 계명은 율법의 정점이며 중심이 된다. 율법의 이웃 사랑은 단순한 박애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 자신이 그 모범을 보여주시고 계시다는 점이고(마태 5,44-45), 둘째는 그 원천이 하느님 자신이시며, 따라서 이웃 사랑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이 된다. 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통해서 애정을 지니고 실천으로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시면서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이기도 하였다. 

요한 1서에서도 이웃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 4,20-21).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시대부터 계시된 옛 것이지만 '새 계명'(1요한 2,7-8)이라고 불리운다. 예수님께서 입법자이신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새롭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율법학자는 감탄해 마지않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마르 12,32-33).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계명이 제사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대답한다. 그는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가르침을 완전히 깨닫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칭찬하신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마르 12,34).

예수님께 나아가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면 이 율법학자는 그들 중에서도 대단히 슬기로웠으며,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후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히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이기적이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좀처럼 이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