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성야(복음: 루카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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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4-14 08:50 조회1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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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주시는 예수님
“그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에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나타났다”(루카 24,4).
오늘밤은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전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밤 장엄한 부활 성야 미사를 드리면서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성대한 빛의 예식과 하느님 구원의 역사인 말씀의 전례를 거행한다. 그리고 예비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마련하신 성찬의 식탁에 초대한다. 교회는 특별히 오늘밤에 빛의 예식을 거행하면서 빛이시며 세상에 빛을 주시는 예수님을 묵상한다.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인 빛에 관한 예언자들의 약속을 실현시킨 위대한 사건이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실 때부터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태 4,16) 하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사 9,1)이 실현되었음을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세상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게 될 구원의 태양, 즉 이방인들에게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셨음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과 행위로써 스스로 당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계시하셨는데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한 9,5)라고 선언하셨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비추시는 것은 당신 안에 빛의 근원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며, 생명과 빛이시며,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시는 참빛이셨다.
빛에 대한 주제는 성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성서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표현 가운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구약에서부터 빛은 하느님의 본성의 일면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표시였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하였다. 이런 의미로 빛은 하느님의 현현을 표현하는 문학적 양식에 속한다. 역시 빛의 근원은 하느님이시다.
시편은 빛이신 하느님을 “야훼, 나의 하느님, 실로 웅장하십니다.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시편 104,1-2)라고 하였고, 예언자 하바꾹은 하느님의 빛에 대해서 “하늘엔 당신의 빛이 찬란하게 퍼지고 땅엔 당신의 광채가 차고 넘치니 그 밝음은 대낮 같구나”(하바 3,3-4)라고 말하였다. 빛의 상징적인 묘사는 모두 하느님의 현현이었으며, 또한 휘황 찬란한 빛이 인간을 비추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빛이셨다. 빛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적으로 표시할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을 나타내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는 빛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이에게 실존적 의미를 주었다. 이 경우 빛은 하느님께서 친근한 분이시며 위엄을 갖추고 계신 분이심을 느끼게 하였고, 하느님께서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빛으로서 인간 세계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후견자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즉 빛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끌어주시고 인간의 걸음을 멈추게도 하시며 인간을 인도하시는 등불이 되셨다.
그리고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두 종류의 운명, 행복과 불행으로 갈라 놓으시는데, 의인을 빛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인도하시고, 악인은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시며 등불이 꺼진 곳으로 떨어지게 하신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것은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윤리적인 차원에서 부각시키셨다. 빛은 선과 의로움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의미하였고, 어둠은 악과 악마의 나라인 사탄의 나라를 가리켰다. 따라서 인간은 빛의 자녀가 되든지 아니면 어둠의 자녀가 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위대한 사건이며, 선과 의로움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빛의 절정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밤 교회는 어둠이 깔린 밤에 찬란한 빛의 예식을 장엄하게 거행하면서 어둠을 비추시는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 우리의 빛’으로 세상에 널리 외친다.
그러면 복음으로 돌아가 오늘 루카 복음 사가가 전하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묵상해 보자.
“안식일 다음 날 아직 동이 채 트기도 전에 그 여자들은 준비해 두었던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이 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 나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주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에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나타났다. 여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전에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어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말해주었다”(루카 24,1-7).
루카 복음 사가는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 마태오 복음 사가는 천사라고 말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눈부신 옷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현을 암시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들의 행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무덤에서 발길을 돌려 열한 제자와 그 밖의 여러 사람들에게 와서 이 모든 일을 알려주었다.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다른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벌떡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수의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24,8-12).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한다. 베드로는 무엇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즉시 안 것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안식일 다음 날 새벽의 사건을 전하면서 특히 여자들이 체험한 빛의 현시를 전하고 있는데, 세 명의 여자들 중에 요안나를 포함시키고 있다.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는 ‘나해-예수 부활 성야’에서 언급하였기에 오늘은 요안나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알아보겠다.
요안나는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루카 8,3)이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했으며,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료를 준비한 여자였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처럼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요안나 역시 관리의 아내이면서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힘닿는데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을 도와드린 여자였다. 요안나의 믿음은 훗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증언하는 증인으로서의 큰 역할을 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다.
오늘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이 넘치는 날이다. 그리고 세상에 찬란한 빛이 충만한 날이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믿고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지는 날이 아닐 수 없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넘치길 빈다.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