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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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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일(복음: 요한 14,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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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5-19 08:50 조회137회 댓글0건

본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오늘은 부활절 제6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성령에 대한 말씀이다. 오늘 복음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시면서 ‘새 계명’(지난 주일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21) 하고 말씀하셨다. 이에 가리웃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시고 사랑의 계명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오늘 복음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3-24).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도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여 주시며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깨달아 아버지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하실 때에 비유로 말씀하시고, 또한 비유를 따로 설명해 주시면서 잘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부활하신 뒤에도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내 보이시고, 그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증언하도록 하셨다. 이렇듯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는 군중들에게 신앙에 대한 강요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더욱이 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고 따르도록 하기 위한 강압이 아니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과 믿음을 주시는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훗날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할 증인들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하셨다. 역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을 잘 깨닫고 지키게 해 주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요한 14,25-26).

사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있었지만 그분의 삶과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더욱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자가 스승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것이다. 특히 주님의 증인이 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그 무거움이 더욱 큰 것이다.

잠시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말씀은 이미 먼 옛날 구약 시대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주어진 계명이었다. 하느님의 백성들인 자녀들이 하느님의 생명을 얻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하게끔 주신 ‘가르침’(가해-연중 제6주일 참조)이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가 질서를 지키면서 행복과 평화를 누리도록 법으로 주신 인간 양심이 지켜야 하는 법령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야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의 핵심을 잃은 채 형식적이고 위선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선행은 실천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법만 지키면 된다는 옹졸한 율법주의가 생겨나게 되고, 까다로운 법령과 규정만을 강조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멍에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만 지키기를 강요하면서, 율법이 사람을 판단하고 죄인 취급하는 데 사용하는 잣대가 되고 말았다. 더욱 위험스러운 것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느님의 은총을 잊어 버렸다.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불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에 대해서 더욱 새롭게 가르쳐주셨는데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신비를 알게 되고 말씀을 깨달아 마음에 새기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성령이 말씀을 다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평화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4,27-2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란 단지 관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평화이다. 예수님의 현의를 깨닫지 못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적인 평화이며,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두려움과 무서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이다.

그러면 영적이고 믿음에서 오는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라는 단어가 뜻하는 것을 음미하려면 성서 전체, 신약성서의 마지막 저서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성서에서는 평화가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평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를 전부 함축하고 있는 어휘로는 히브리어 동사 ‘샬람’(salam, 평화를 소유하다. 평화롭다)이 있다. 같은 어원의 명사로 ‘샬롬’(salom, 평화)이 있고, 아람어의 ‘슬렘’(평화)이 있다. 동사인 샬람의 어근의 의미는 완전한 상태인 ‘완전’을 뜻하며, 여기에서 ‘건강, 번영, 행복’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평화는 어떠한 종류의 평화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완전한 상태를 말하였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운명을 쥐고 계심으로 그의 평화는 곧 ‘구원’이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이사 52,7).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주의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평화에 대한 약속이 곧 메시아의 구원이었다.

평화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다. 왜냐하면 회개하기 전의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분리된 상태이며, 하느님과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 이전의 잘못된 관계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되었는데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고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떠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다. 마지막 만찬에서 사랑이라는 새로운 계명과 성령에 대한 약속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참 평화를 주셨다. 제자들은 훗날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음과 사랑에서 오는 참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 평화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참평화이다. 참평화를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하자.

바오로 사도는 평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