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복음: 루카 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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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7-18 18:20 조회1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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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루카 11,1).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기도에 대한 말씀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청하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하고 가르쳐주셨는데 그 기도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루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루카 11,1-2).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부단히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기도를 통하여 인간이 바라는 기대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고, 신앙의 기쁨을 가르쳐 주셨으며, 하느님의 뜻인 세상을 구원하려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위를 드러내시며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실 때마다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마태 6,9-13)과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 두 곳에 나온다. 두 복음 사가는 주님의 기도문을 전하는 데 있어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례에서 사용하던 기도문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가 개인적으로 사용한 기도가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한 전례적인 기도문이었다는 것이다. 전해진 바로는 루카 복음 사가가 전하는 기도문이 보다 짧고 원본에 가까우며, 가장 초기에 그리스도교 모임의 예배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초기에 편찬된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릴 때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초기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 복음서와 함께 ‘주님의 기도’를 대단히 중요시한 것 같다.
이 기도문을 보면 당시에 유다교의 기도 형식과 매우 유사하였다고 한다. 당시 유다교 랍비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상황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하루 빨리 재림하시어 구원해 주시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기다림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b).
‘주님의 기도’는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시작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표현은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보여주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그 자체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전적으로 결정 짓는다. 자녀가 아버지께 드리는 신앙이며 자신을 봉헌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유다교의 기도문에도 나타나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부른 것이 아니고 회당에서 예배할 때 공동으로 ‘우리의 아버지’라고 호칭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도 야훼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였는데 이 역시 전례적이었다. 이사야서는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른다 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외면하여도, 당신, 야훼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당신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라고 불러왔습니다”(이사 63,16)라고 전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자주 부르셨다. 루카 복음 10장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시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마르코 복음 14장 36절에서는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직접 부르셨다. 성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예수님의 의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것은 유다교의 신앙생활과 구약에서 전례적으로 호칭된 것 이상으로서, 예수님의 ‘담대한 호칭’이라고 언급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호칭은 전례에서 사용하는 단순한 아버지의 칭호가 아니라 친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호칭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다”라는 말은 단순한 전례적인 호칭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다”라는 호칭이 된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기도가 이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주님의 기도 중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하느님의 본성과 능력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과 능력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아들이는 그날까지 이 기도는 끊임없이 바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믿기를 바라는 종말론적 선교의 기도가 된다.
또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는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이며 가르침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오심으로써 이미 이 세상에 왔고 하느님 나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요청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기도는 종말론적인 기도가 된다. 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도는 대단히 간절했으며 곧 오시리라는 긴장과 함께 긴박한 기도였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아버지의 나라가 곧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그러한 기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지연되었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가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 요청의 기도 또한 유다교의 기도 형식이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메시아께서 하루 빨리 왕으로 오시어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는 하느님의 뜻인 세상의 복음화와 세상의 구원을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다시 한 번 요청하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성취되는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며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Maranatha, 마라나타)을 구하는 기도가 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3-4)라고 기도하신다.
오리게네스는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기를 요청하는 이 부분은 복음서 저자들이 삽입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 생활의 필수품을 말하는 우시아(usia, 물질)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페쉬타(Peshitta)역과 아람어 성서에서도 그렇게 이해되고 있으며, 제롬은 이것을 ‘가장 필수적인 떡’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잠언 30장 8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레헴 후키(필요한 양식, 내 몫의 양식)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필요한 양식’은 물질적인 빵이지만 ‘주님의 기도’ 전체에서 지배적으로 흐르고 있는 종말론적인 어조로 보아 종말에 가서 메시아의 잔치에서 받게 될 양식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넓어진다. 따라서 현재 바라고 있고, 감사함으로 받는 물질적인 빵은 종말의 혼인 잔치에서 먹게 될 빵을 미리 맛보는 빵으로 ‘빵을 떼는’ 성찬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필요한 양식을 바라는 기도는 종말의 그날까지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면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라는 기도가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는 서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죄의 용서를 청하는 화해의 기도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체성사의 필요한 양식을 청하는 형제들과 상호 화해를 전제로 아버지께 죄의 용서를 청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면서 아버지께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미래에 닥쳐올 유혹을 이겨 낼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는 기도이다. 유혹은 예수님에게서조차 있었던 것으로 항상 대비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그날까지 항상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사는 공동체의 기도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열심히 바쳤다. 성서 역시 전반적으로 기도에 관한 모든 교훈은 ‘주님의 기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를 보충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도에서 청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기도의 근본이며 조건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기도가 종말의 그날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를 하나 해주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 한 사람에게 어떤 친구가 있다고 하자. 한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가서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 내 친구 하나가 먼 길을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어놓을 것이 있어야지’ 하고 사정을 한다면 그 친구는 안에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 하고 거절할 것이다. 잘 들어라.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카 11,5-13)
기도란 이루어지리라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바쳐야 한다. 바라는 것을 이룰 때까지 계속 바쳐야 하는 오랜 인내를 요구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하시면서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꾸준히 바칠 것을 말씀하셨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뜻인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의인 몇 사람이면 족하다. 에제키엘과 예레미야도 한 사람의 의인으로 도시 하나를 구하기에 충분하다고 선포하였고 이사야는 한 사람의 ‘종’이 모든 민족을 속량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서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창세 18,32)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진실로 의인의 기도를 바라신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미사성제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때까지 주님의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야 한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매 미사 때마다 드리는 우리의 기도(주님의 기도)를 틀림없이 들어주실 것이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