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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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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복음: 루카 12,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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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8-11 11:31 조회98회 댓글0건

본문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 12,49)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는 세 가지 말씀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때문에 일어나는 내적 갈등과 엄청난 일들, 그리고 각오와 큰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을 하신다. 오늘 복음을 일명 칼의 복음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마태오 복음에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불이 상징하는 의미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사용되어 왔다. 먼저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때 하느님의 현시 현상으로 표현되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은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햇불이 쪼개 놓은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창세 15,17)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일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기둥으로서 인도하신 일,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불 가운데서 나타나신 일 등이다. 따라서 불은 하느님의 현시와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불은 거룩함의 상징으로서 하느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백성 안에 실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불은 악한 이들을 벌하시고 사악함과 악을 쓸어 버리는 형벌의 도구로서 하느님의 분노와 질투를 드러내신 표출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불이 태우고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나는 노여움에서 퉁겨나는 불꽃이 저 밑 황천에까지 타 들어가며, 땅을 그 소출째 삼켜 버리고 멧부리까지 사르리라”(신명 32,22) 하면서 하느님의 분노를 표현하였다. 불은 때때로 하느님의 분노로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후대에 예언서를 보면 종말론적인 심판의 형벌로서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불을 심판의 요소로서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불을 우상숭배와 같은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데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재물과 희생이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상징하듯이 불도 그러한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불은 세상의 죄와 악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본성인 하느님의 영을 상징하였다. 또한 불은 성령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약성서에서 ‘불에 의한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뜻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 12,49)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신 본성을 드러내시며 세상의 악을 없애시고 세상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세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카 12,50).

복음서를 보면 세례에 대한 말씀이 초기에는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보여지지만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신 후에는 별로 언급이 없고, 다만 마르코 복음서와 오늘 복음에서 새롭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마르 10,38).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하느님 나라의 특별한 자리를 요구하자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례는 단순하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세례였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 역시 고난과 수난이 동반되는 세례이다. 예수님께서는 받으셔야 할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고난과 수난을 암시하시면서 당신이 겪으셔야 할 인간적인 고뇌를 드러내셨다. 이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수난의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분열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루카 12,51-53).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겪어 내야 하는 인간적인 내적 아픔과 고통을 말씀하시면서 큰 각오와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단란한 가정과 가족들 안에서 서로가 반대하고 헤어져야 하는 인간적인 고뇌와 결단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상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과 세상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함으로써 오는 고통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주러 오신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동족들로부터 큰 고통을 당한다.

“대신들은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줄에 매달아 근위대 울 안에 있는 왕족 말기야의 집 웅덩이에 내려 보냈다. 그 웅덩이는 물이 없는 진흙구덩이였다. 예레미야는 그 진흙구덩이에 빠졌다”(예레 38,6).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자기 동족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큰 고통을 당하고 괴로워했다. 이렇듯 구약의 예언자들은 진리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큰 희생과 고통을 당하였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죽음은 훗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가 당하실 죽음의 예표였으며, 이는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할 십자가이기도 하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a).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굳게 믿으면서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단호한 선택의 결단과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