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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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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복음: 루카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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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9-22 08:48 조회140회 댓글0건

본문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진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지난 주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약은 청지기’의 이야기를 듣고 부정직한 청지기와 세속의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뜻을 헤아리지 않고 액면 그대로를 트집 잡으려 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보를 다 아시고 하느님의 심판이 마음가짐에 입각한 것이지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물질적인 부가 삶의 안내자로서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입증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라자로와 라자로가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부자 주인과 대조되고 있다. 복음의 이야기를 보자.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16,19-31).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은 거지가 ‘라자로’라는 특정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부자는 이름도 없이 나온다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데 라자로라는 이름은 ‘가난한 거지에 대한 하느님의 도우심’이라는 뜻으로 이 이야기에서 적절하게 선택된 이름인 것 같다. 이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와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는 학자들간에 다소 다른 견해가 있으나 이들은 각각 다른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셨거나 유사한 이야기로부터 발췌해 내셨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비유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땅 위에서의 장면이고, 두 번째는 내세에서의 장면이다. 종기투성이의 가난한 라자로는 화사하고 값진 옷과 좋은 음식으로 호화롭게 사는 부자의 대문간에 앉아 구걸하며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했다. 당시에 부자들은 식사 중에 빵으로 손을 닦아 냈기 때문에 빵 부스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비참하게 그 주변에 더러운 개들까지 모여들어 와서 힘없는 거지의 상처를 핥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죽자 상황이 바뀌었다. 거지였던 라자로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 나라의 향연이 열리고 있는 영광된 자리에 앉게 되었고,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져서 불꽃에 싸여 고통을 받게 되었다. 또한 두 사람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큰 구렁텅이에 대한 이야기는 유다교 신앙에 나오는 것인데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서로를 볼 수 있으나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텅이가 가로놓여져 있어 서로 건너갈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비유 속에서 라자로는 아무 말이 없는 반면, 부자는 아브라함 할아버지를 부르면서 품속의 라자로에게 물을 보내어 자기 혀를 시원하게 해주도록 간청하고 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 부자도 자신의 아들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자는 하는 수 없이 라자로를 그의 다섯 형제에게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그의 청을 거절했다. 이유는 그들 형제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을 때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간다해도 뉘우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비유는 세 가지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이기적인 부자에 대한 경고이고, 둘째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종말론적 운명의 바뀜이고,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도움 요청을 자주 거절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의 거절이 마지막 날에 가난한 사람들의 거절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동냥 사절’이라고 하지만 훗날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부자 사절’이라는 말을 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땅에는 먹을 것을 얻으려고 부잣집 문을 두드리는 가난한 사람이 있고, 하느님 나라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는 부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자는 세상에서 언제든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어 구원될 수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돕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우리의 구원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경고를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부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한다.

“저주받아라! 시온을 믿고 안심하는 자들아,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보료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떼 가운데서 양 새끼를 골라 잡아먹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잡아먹는 것들, 제가 마치 다윗이나 된 듯 악기를 새로 만들고, 거문고를 뜯으며 제 멋에 겨워 흥얼거리는 것들,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 먹으며, 요셉 가문이 망하는 것쯤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들, 덕분에 이제 선참으로 끌려가리니 기지개를 켜며 흥청대던 소리 간 데 없이 되리라”(아모 6,1a. 4-7).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저주의 말이다. 이스라엘은 본래 가난한 유목민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착하게 살았는데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면서 도시 문화에 젖어 쾌락에 빠졌다. 하느님께서는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던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도와주셨는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면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탐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그들을 그냥 두시지 않겠다고 경고하셨다. 쾌락에 빠진 부자들에 대한 경고는 오늘날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내리는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