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복음: 루카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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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9-30 08:51 조회1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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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힘과 종의 의무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루카 17,6).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일 복음으로 ‘어리석은 부자,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 낮은 자리에 앉아라, 잃었던 양 한 마리와 잃었던 은전, 약은 청지기, 부자와 라자로 등’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믿음의 힘과 종의 의무’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가르쳐 주시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의무를 다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말씀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4) 하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형제에 대한 용서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후한 숫자로 세 번까지 용서해주는 통례가 있었는데 하루에 일곱 번을 용서(가해-연중 제24주일 참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믿음에 대해서 잘 알고 청하였는지 아니면 형제에 대한 용서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말씀을 드렸는지는 모르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주시라고 청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청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놀라운 힘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즉 믿음만 있으면 형제에 대한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복음은 먼저 ‘믿음의 힘’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까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17,5-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위대한 힘에 대해서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믿음에 대해서 깨달은 것은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였다. 박해가 한창일 때 제자들 모두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믿음에 감사드리면서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인하여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에게 일어났고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였던 그가 믿음을 가진 뒤에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 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대를 깨우쳐 줍니다. 내가 그대에게 안수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2디모 1,6-7).
그리고 복음은 ‘종의 의무’에 대해서 이렇게 전한다.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주인이 ‘종’에 대해서 가혹하게 혹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종’은 노예적인 주종 관계가 아니라 주인의 상속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주인의 상속자로서 종이 지녀야 할 의무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셨다. 상속자로서 종의 의무를 보면 주인의 농사 일이나 가사, 집안 일을 모두 맡아 하는 일들이다. 따라서 종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서 식탁에서 주인의 시중을 든다고 해서 더 많은 일을 한 것도 아니며, 따로 사례를 받아야 할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상속자로서의 종은 오직 그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상속자인 하느님의 자녀들은 누구도 그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의무 이상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일할 때마다 그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속자로서 하느님의 종들에게 주어진 그의 의무에 속한 일을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이었다.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도 항상 자신들의 공로에 대하여 하느님의 칭찬과 그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모든 것을 계산해 두었다. 그들은 일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하느님께로부터 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계산된 보상 관념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적인 보상 개념을 바꾸시면서 하느님의 상속자인 종으로서 하느님의 일에 충실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면 잠시 성서 안에 나타나는 보상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보상이란 주인과 하인의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즉 정의의 법칙에 따라서 모든 행동에는 그 대가가 따르기 때문에 사람은 정당하게 보상, 즉 보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성서에서의 보상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개념을 초월한다. 성서에는 ‘보수’를 뜻하는 말로 표현되고 있으나 보상을 노동에 따르는 당연한 보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상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보상에 대한 개념을 보면 인간은 태초부터 하느님께보상을 받았는데, 하느님께서는 공정한 주인이시므로 맡겨진 일을 마친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르치는 보상은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보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노예가 아닌 상속자로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연히 따라 나오는 결과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보상은 구세사 초기부터 나타나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창세 15,1) 하시며 상을 약속하셨고, 성서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묵시 22,12) 하고 종말론적인 상을 제시하셨다. 이렇듯 성서는 전반에 걸쳐서 각자에게 상과 같은 의미의 “품삯”(루카 10,7), “삯”(요한 4,36)에 대해서 말하였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꼭 받아야 하고 청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혜서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오묘한 뜻을 모르며 거룩한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깨끗한 영혼이 받는 상급을 믿지 않는다”(지혜 2,22).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6).
이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다하는 자가 보수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는 하느님 앞에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에 있어서 상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상속자인 당신 자녀들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하느님의 생명이고 은총이며 또한 축복이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상은 상속자가 그 의무에 충실함으로써 얻어지는 은총의 보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보상은 인간이 행하는 척도에 따라서 부여된다는 보수였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공적이 하늘에 쌓여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고 믿었다.
신앙인은 보상에 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처럼 현세적인 이익, 영예, 명성, 인정, 관심 같은 보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동기에서 선행하는 자에 대하여 루카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카 14,12-14).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보수는 하느님 나라의 상속이며,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1데살 4,17).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보상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졌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분을 의인으로 내보이셨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상속자인 종으로 주어진 의무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의무는 하느님의 은총인 생명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의무는 말씀을 언제나 새롭게 듣고 실천하는 것이고, 진리를 신장시키며 모든 시대에 복음의 꽃을 피우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상속자인 종으로서 주어진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