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일(복음: 루카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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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0-02 11:07 조회1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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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루카 17,17)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계시다는 사실에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사마리아 근방에서 일어났던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주 ‘믿음의 힘과 종의 의무’에 이어서 나오는 오늘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져주시는 은총과 선물을 어떻게 올바로 받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루카 17,11-1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지나가려 하셨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냉대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들어가시지 못하고 다른 길을 택하시어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 있는 한 마을에 들리셨다. 그곳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청하였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17,12-19).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청하였다. 율법에 악성 나병 환자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사람을 피해 가야만 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고 있는 악성 나병 환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을 병을 고쳐 주실 분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 자비를 간절히 바라듯이 메시아이신 그분께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를 외쳐댔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궁휼이 여겨 달라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병이 나은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해줄 사람들에게 그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것은 율법에 사제들이 나병의 증세를 판결하고 격리할 사람들을 구분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들에게 지시한 단순한 말씀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사제들에게 갔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나병이 깨끗하게 치유되었다.
그러나 치유가 이 사건의 주된 요지는 아니다. 복음 사가는 나병의 치유가 아니라 병이 나은 후에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병 환자들은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나병이 나았는데 그들은 나병이 치유되었음을 기뻐하였을 뿐 자기들의 병을 낫게 해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나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감사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었다. 다른 아홉 사람은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자신들의 몸을 보이는 것만이 중요했다. 따라서 루카 복음 사가는 다시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감사 드리는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과 행동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이방인에게도 실제로 구원이 주어지고 있음을 증언한다.
이방인으로서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모습은 오늘 제1독서에서도 나온다.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이스라엘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 소인이 감사하여 드리는 이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2열왕 5,15).
당시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긴장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나아만은 시리아의 장군이면서 나병에 걸려 있었는데, 시리아의 의사들과 기적쟁이들은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때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하녀가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엘리사에게 가서 그의 몸을 보이라고 제안했다. 나아만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적에게 몸을 맡겼고, 엘리사는 찾아온 나아만에게 단지 요르단 강물에 몸을 씻기만 하라고 하였다. 엘리사가 요구한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나 커다란 제사가 아니었다. 엘리사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큰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그가 지시한 단순한 행동은 다만 나아만의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커다란 값을 치르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고 나서 나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께 대한 종교적인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이제부터 저는 야훼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2열왕 5,17) 하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믿음을 원하고 계신다. 이 사건 전체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자비하심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세계에도 널리 주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이스라엘 민족이 보여준 배은망덕을 예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셨다. 하느님께서는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구해 내시고 40년간의 사막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체험하게 하셨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행복하게 살게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이방인에게 시선을 돌려 떠나려 할 때에도 버려 두지 않으시고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그들을 지켜주셨다. 이처럼 긴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아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주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의 육체적인 치유에만 기쁨을 가지고 하느님을 외면하는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처럼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감사도 찬양도 드리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진실로 당신을 믿고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나병 환자들의 치유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믿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믿음을 바라고 계신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오.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2디모 2,8-9a).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하면서 그분이 곧 다윗의 후손이었음을 상기시키고 그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갇힌 사실을 증언하였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떠나 찬양과 감사 드릴 줄 아는 이방인에게도 열려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믿음이 항상 찬양과 감사 드림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곧 신앙고백이다. 이렇듯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구원의 문이 열릴 것이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