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복음: 루카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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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0-13 08:50 조회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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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와 재판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루카 18,1).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다.
교회는 매년 10월 마지막 전 주일을 ‘전교주일’로 정하여 교회의 사명인 선교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전교 지역의 교회와 전교 사업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와야 한다. 오늘은 전교주일 복음(가해-전교주일 참조)보다는 연중 제29주일 복음에 대해서 알아보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쳐주셨는데 하나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와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다음 주일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 비유인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 끊임없는 기도를 권유하는 기도이며, 두 번째 비유인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는 겸손을 권유하는 기도이다. 그러면 오늘 복음을 보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 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1-8)
여기에서 재판관은 하느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실로 악한 자이다. 우리는 즉시 이러한 류의 인간에게는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재판관에게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불쌍한 과부의 모습이 비교되어 이야기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성서에서 재판관은 하느님의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서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하고 공정을 베푸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에 이어 판관 시대에는 판관, 즉 재판관이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최고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지파적인 권위를 가진 재판관들이 성서에 나타나는데 제사장들이 재판관의 기능을 행사하였고 이로써 성소가 재판하는 곳이 되기도 하였으며,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소에서 재판관으로 봉사하였다. 이들 재판관은 사무엘이 행했던 것과 같이 여러 성읍을 순회하며 다스리기도 하였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대제사장이 재판관이었으며, 산헤드린이 유다인의 최고 법정이었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부정부패가 있기 마련이듯이 모든 장소와 시대에 있어서 불의한 재판관들이 있었으며 재판관들의 부정은 널리 알려져 있던 일이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재판관과 달리 과부는 하느님의 관심 대상으로 흔히 고아나 나그네와 관련되어 있다. 먼저 알아 둘 것은 성서에 나오는 과부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남편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성서에 딱한 처지에 있는 과부들이 심한 고통을 받았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재난의 위험에 직면하거나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과부는 언제나 그 희생자 가운데 포함되곤 했다. 성서는 가난하고 힘없고, 재난이 있을 경우에 제일 먼저 피해를 입고 고통당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대변하여 상징적으로 과부를 등장시킨다. 그래서 성서에 부정한 행위에 대해 외친 예언자들이나 기자들의 엄한 책망 가운데는 과부를 학대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너의 지도자들은 반역자요, 도둑의 무리가 되었다. 모두들 뇌물에만 마음이 있고 선물에만 생각이 있어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과부의 송사를 외면한다(아사 1,23).
히브리어로 ‘과부’는 ‘소리내지 말고 있어라’라는 뜻의 ‘Im’과 흡사한데 이것은 과부가 벙어리처럼 억눌려 살아야 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과부의 의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생활과 정신적으로 더욱 압박을 받았다.
성서는 과부에 대해서 항상 관심이 지대했으며, 또한 공동사회에게는 그의 궁핍한 입장을 인식하고 도움을 주어 보살피도록 강조하였다. 율법서와 예언서는 성문서 집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상황에 대한 확실한 예를 “너희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8-29a)라고 보여 주었다.
성서는 그 외에 곡식과 포도를 거두어들일 때에도 이들의 굶주림을 고려하여 이들이 이삭을 주워 가도록 추수 가운데 일부를 놓아두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과부는 음식과 의복을 제공해주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었다. 그리고 성서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은 너무나 은혜로우셔서 고아들과 과부들이 주님께 의지하기만 하면 바로 그들을 살게 해주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시편에서는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거룩한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시편 68,5)라고 하느님을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보호자’로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도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겉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을 질책하심으로써 과부에 대한 성서적 관심을 재확인하셨다. 그리고 과부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믿음이 있고 성실한 사람들의 관심 가운데 항상 반영되어져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데 결국에 이 고약한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고 있다. 이유는 재판관의 정의에 대한 관심이나 과부를 불쌍하게 여겨 그의 청을 들어주는 마음의 움직임도 아니다. 다만 과부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보다 더 귀찮게 굴 것 같아서 그녀의 청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재판관의 품격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하심과 끊임없는 과부의 요청에 있다.
성서에서 최고의 재판관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 불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시는 최고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며,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사람들의 심판관으로 판결을 내리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재판관으로 불리우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판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요한 8,15-16).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로 논증해 나가셨다. 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이 행한 것은 하느님의 의로우심 앞에 실로 아무것도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것 이상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시고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끈질긴 과부가 예시한 바와 같이 믿음의 항구성을 가르치시고 당신이 돌아오실 때 그러한 믿음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비유를 마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끊임없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