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복음: 루카 20,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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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1-03 14:23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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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대한 토론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불사불멸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현대인들 중에는 영혼의 불사불멸과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영혼의 불사불멸과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 주는 허무함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지상의 목숨이 끝난 후에 다른 모습으로 생명이 계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부활을 믿지 못함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부활에 대한 토론을 하시면서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신다. 먼저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와 살고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루카 20,27-33)
복음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 마지막 며칠 동안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과도 많은 논쟁을 벌이셨다. 이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 하였지만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찾아 와서 부부에 대한 모호한 질문을 하였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신명기에 나오는 부부에 대한 법령을 예로 들어 질문하면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 하였다.
신명기에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나온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신명 25,5-6).
신명기에는 부족의 가문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법령이 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당시에 종족 유지와 번성을 위한 뜻으로 정해진 법령 그대로를 대답하기 난처한 것을 물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이 신명기 법령을 묘하게 예로 들어 질문한 것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그들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200년 동안 번성했던 유다교 제사장 분파였다. 그 기원과 초기 역사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많지 않으나 이 종파의 이름이나 귀족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미루어 보아 솔로몬 시대의 ‘사독’(Zadok)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종교 의식과 율법의 많은 세부 사항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 내용과 범위에 대해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립한 자들이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문서화된 모세오경(토라) 외에는 성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세오경과 함께 구전된 전승도 모세 율법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인 반면 그들은 구전된 율법을 무시하였다. 또한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죽음 이후의 영혼 불멸성, 육체의 부활, 천사 같은 영적 존재를 부인하였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고, 정치적으로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부와 오만한 태도, 로마 통치자들과의 타협은 일반 사람들의 미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의 로마 보호 정치 아래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면서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을 이끄는 데 맛을 들인 그들은 현상 유지(로마의 보호)를 옹호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출현을 크게 경계하였다. 당시에 그들은 유다인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다해-주님 수난 성금요일 참조)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사제 안나스(나해-주님 수난 성금요일 참조)를 꼽을 수 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재판하고 죽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성전 예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에는 역사에서 급속히 사라졌다.
그러면 잠시 ‘사두가이파’의 기원을 살펴보자. ‘사두가이’란 이름이 유래된 사독은 에비아달과 함께 다윗 시대의 제사장이었는데 압살롬의 모반 때 언약 궤를 맡은 직분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마지막 날, 그의 왕위 계승을 위한 투쟁 중에 솔로몬을 지지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데, 솔로몬의 승리는 곧 사독의 승리였다. 에비아달이 쫓겨난 뒤에 사독은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후 그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에서 특출한 제사장 가문을 이루었으며, 그 후손들이 계속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히즈키야의 대제사장 아사랴 또한 ‘사독의 족속’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면 될수록 사독 가문의 위세는 더욱 강해져 갔다. 사독 가문의 행운은 포로 생활 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에스델서와 역대기에서 사독 가문에 부여한 위치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들은 에스델 40장부터 48장에 기록된 대로 성전을 복원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을 자기들 가문의 사람들이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받은 하느님의 상급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모세 시대 이래로 제사와 예배 직분을 담당해 왔던 레위 족속은 지위가 낮아지고 자기들만이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듯 사두가이는 예루살렘 제사장직의 원조로부터 그 이름과 계보가 유래된 것이었지만 마카베오 시대에 와서 한 당파로 등장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서는 그들을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두가이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적 존재도 다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사이파는 그런 것이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사도 23,8)라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리석고 쓸모 없는 것으로만 보였고 그들은 오늘 예수님께 그들 논리에 따른 모호한 질문을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4-38).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답변하셨다. 부활의 세계에는 결혼할 필요도 없고 계속 살아 남기 위하여 대를 이을 필요도 없고, 또한 죽는 일도 없으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나 죽은 후에 다시 살아 난 사람이나 다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이 좀 어렵게 들리겠지만 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고있는 우리들의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다시 살아난 자들의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 세상에 살다가 죽더라도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만일 인간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면 죽은 사람에게 하느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하느님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의미로서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을 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한 말을 인용하시면서 그가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불렀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과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어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모세가 증언하는 것이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
‘육체의 부활’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란 말은 우리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교리이다. ‘육체의 부활’(나해-예수 부활 대축일 참조)과 ‘죽음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렵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며 신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는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확인되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미 세상을 떠나 주님 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부활도 역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야 한다.
“나는 지금 사람의 손에 죽어서 하느님께 가서 다시 살아날 희망을 품고 있으니
기꺼이 죽는다”(2마카 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