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복음: 마태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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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2-13 14:11 조회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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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지 말라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
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마태 6,1).
오늘은 ‘재의 수요일’이다.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 교회는 오늘 회개와 속죄를 상징하는 재를 축복하며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거행한다. ‘재(災)를 얹음’은 이미 구약에서도 참회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욥기를 보면 욥이 잿더미 위에 앉아 하느님의 시험을 받아들였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말라.’ 사탄은 야훼 앞에서 물러 나오는 길로 욥을 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부스럼이 나게 하였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욥기 2,6-8).
하느님께서 욥을 시험하시려고 사탄의 손에 붙이셨을 때 욥은 잿더미에 앉아 속죄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요나서를 보면 니느웨 왕도 백성들과 함께 하느님께 참회를 하는데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 하룻 동안 돌아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듣고 니느웨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요나 3,4-6).
하느님께서 타락한 니느웨를 벌하시려고 하실 때 니느웨 임금은 백성들과 함께 하느님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잿더미 위에 앉아 속죄와 참회를 하면서 벌을 피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재’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마태오 복음서에 이렇게 나온다.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재를 얹음’은 하느님께 죄를 뉘우치며 속죄할 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통 단식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우는 겸손의 행위였다. 따라서 교회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단식과 금육을 지키면서 이마에 재를 받는다. 이는 하느님께 절제하는 모습으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함을 보여드리는 것이며, 속죄에 대한 결심과 실천적 의지가 담긴 것이다.
매년 재의 수요일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하는 ‘선행’에 대한 말씀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행은 특히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다. 말씀하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조상 대대로 실천하고 지켜온 종교적인 의식이자 행위인 신앙 덕목이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베풀 때에 가져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서 새롭게 가르치신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마태 6,1).
선행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상, 즉 은총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인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선행 중에 ‘기도와 단식’에 대해서는 다음 해에 알아보기로 하고, ‘가해’인 올해에는 ‘자선’에 대해서 살펴보자. 자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2-4).
히브리어에는 자선을 뜻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 그러나 70인 역본에 자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엘레모시네’(Eleemosyne)가 있다. 그런데 ‘엘레모시네’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이 동족을 위해 베푸는 ‘인간의 자비’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포함시켜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인간의 자비’인 인간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자선은 행위로 표현되지 않으면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행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궁핍한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 안에 나타난 인간의 자비인 물질적 자선은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인간이 형제에게 베푸는 자애의 표시인 물질적 자선은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자선의 개념은 성서적 종교와 동시에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서적 종교는 처음부터 형제와 가난한 자에 대해서 사랑을 강조하였고 물질적 자선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자선은 고대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꼭 지켜야 할 법률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레위기에 자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말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말라.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 먹도록 남겨 놓아라”(레위 19,9-10).
가난한 형제에 대한 배려를 법령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가난한 형제에 대해서 성서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또한 자선에 대한 의무로 이런 말이 있다.
“너희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 안에 저장해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8-29).
성서는 가난한 자들이 있는 한 너그러운 마음으로 정성껏 그들의 처지를 돌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선은 단순한 박애여서는 안 되고 종교적 행위라야 한다. 일시적이고 감상적이어서는 안 되고 의무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행위로서 이 자선은 직접 하느님께 행하는 일이며, 하느님의 보답과 죄의 용서를 받을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선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와 같은 것이며, 자기의 재물을 포기하면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토비트서를 보면 아버지 토비트는 아들 토비아에게 이렇게 타이르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든지 외면하지 말라.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네 재산 정도에 맞게 힘 닿는 데까지 자선을 베풀어라”(토비 4,7-8).
그리고 토비트는 아들에게 자선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네가 곤경을 당하게 되는 날을 대비하여 좋은 보물을 쌓아 두는 일이 된다.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된다”(토비 4,9-11).
신약에 와서 이 자선에 대한 가치는 더욱 드러나게 되며, 종교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단식과 기도와 더불어 종교 생활의 삼대 지주의 하나로 가르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권하시면서 위선자들처럼 칭찬받으려고 나팔을 불지 말고, 되받을 생각도 하지 말며, 제한 없이 행하도록 요구하신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바라시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어떠한 청에도 귀머거리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선에 있어서 불행한 형제에게 베푼 자선은 당신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종교적 선행으로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는 것이며, 곧 예수님께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 동안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속죄와 선행으로 충실하게 지내야 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