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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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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복음: 마태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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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6-29 08:53 조회37회 댓글0건

본문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유와 겸손’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온유와 겸손’은 하느님의 신성으로서 이미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주 언급되어왔으며, 하느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지녀야 할 심성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유와 겸손에 대한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먼저 아버지께 긴 기도를 하신다.

“그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5-27).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바치신 기도를 보면 예언자들이 하느님께 드린 기도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형식을 취하신다. 물론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아니시다. 그러나 가끔은 당신 자신이 예언자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그 운명의 주인공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신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적 표징들을 보고 예수님께 예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끔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예언자는 누구인지 잠시 살펴보자. 예언자들은 말씀을 지닌 사람들로서 소명에 따라 하느님의 뜻과 구원 계획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당당하게 전해야 했고, 그 시대의 그릇된 생각과 삶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미움과 배척, 죽음까지도 당해야 하는 큰 시련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파견된 자로서 하느님의 현존과 자기들의 체험에 대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기 때문에 항상 부담감과 내적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을 갖기도 하고 ‘얼이 빠져’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큰 시련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 야훼께 기도를 드리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사랑이심을 찬양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를 보면 예언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좌절과 실망에서 오는 서정적인 기도를 바치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늘 왜 이러한 기도를 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하시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오늘 기도하시기 전에 ‘저주받은 도시’에 대한 말씀이 있으셨듯이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마태 11,23)라고 하시면서 크게 화를 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보시고 서정적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부를 수 없는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신다.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전례적으로 공동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렀을 뿐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과감하게 부르신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신성이 있으심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겨주셨음을 말씀하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외면하고 철부지 어린아이들만 말씀을 들으려 한 것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으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누구인가?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하늘나라의 주인들이 될 사람들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이어서 ‘온유와 겸손’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께서는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죄에 짓눌려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신다. 그들에게 평안함과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자 하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와 ‘겸손’하심은 무엇인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선성이다. 과거 하느님께서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마음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항상 초대하시고 자비로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따라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하신 본성을 지니고 계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온유와 겸손’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본성으로, 훗날 오실 메시아께서 지니신 성품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해진 종교적인 단어였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다 하심은 당신께서 곧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온유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말씀과 법과 지혜로 먹이시며 관대함으로 사랑해주셨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 또한 참된 온유의 본보기였다. 모세에게 있어서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심에서 나오는 하느님께 드리는 겸손한 순종이었다.

이런 겸허한 온유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실 ‘남은 자’와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주실 메시아의 특성이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철부지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표본이었다. 그러므로 온유란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목자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겸손에 대해서 보면 ‘겸손’은 겸허한 태도이다. 일반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오만한 자와는 달리 어리석은 자만심을 갖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고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서에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한 겸허보다 좀 더 깊은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자각한 사람들이 갖는 태도이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으므로 자기는 가치 없는 종에 불과하며 죄인임을 깊이 깨닫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앞에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 두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영광을 주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야 말로 즈가리야가 예언했던 대로 참으로 겸손하신 메시아이시다.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겸손한 분이시며, 또한 겸손한 자들의 메시아이심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을 겸손의 전형으로 제시하신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선성인 온유와 겸손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잠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에 대해서 살펴보자. ‘멍에’에 대한 말은 율법 교사들이 율법 준수를 위해서 ‘율법의 멍에’라는 말로 자주 썼던 은유이다. 예수님께서도 ‘랍비’의 모습으로서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멍에에 대해서 내놓으셨다. ‘멍에’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나무로 만든 틀로, 두 마리의 소나 수레를 끄는 짐승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목에 걸쳐놓는 것이다. 또한 멍에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을 때 사람들에게도 씌웠다고 하는데 노예들에게는 나무나 쇠로 만든 멍에를 씌울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멍에는 성서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창세기에서 이사악은 에사오에게 야곱이 씌어준 멍에를 목에서 떨쳐버리라고 말하였다(창세 27,40). 또한 집회서에서는 “네 목에 지혜의 멍에를 씌워라”(집회 51,26) 하고 말하였다. 당시에 종속이나 고역의 상징으로서 멍에가 널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온유와 겸손에 대해서 ‘멍에’라는 은유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신성이시며 예수님의 본성인 온유와 겸손한 마음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본성인 온유와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모든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가 있고, 편히 쉴 수 있으며,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1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을 지닌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삶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성령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