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마르 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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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9-30 08:50 조회3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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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7-9).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부에 대한 사랑의 신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부부에게 있어서의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한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 들었으므로 늘 하시던 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10,1-2).
실로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들의 질문에 어떠한 답변을 하시더라도 꼬투리가 잡힐 수 있는 질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 하고 반문하시자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혼장'이란 유다인 법률, 즉 율법에 만약 남편이 그 아내와 이혼하려고 했을 때, 그 아내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야 했던 문서이다. 신명기 법전에 보면 이혼장에 대해서 이렇게 나온다.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신명 24,1).
만일 남편이 그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했다면 이혼이 가능했다. 여기에서 남편은 이 '수치스러운 일'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아내를 버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수치스러운 일이란 무엇인가? 랍비들마다 '수치스러운 일'을 다르게 해석했는데, 랍비 샴마이(Shammai)는 그것이 간음을 의미한다고 풀이했고, 랍비 힐렐(Hillel)은 음식을 태운 행위까지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이 풀이는 후대 랍비학파들 사이에 오랜 논쟁의 실마리가 되었다. 아무튼 구약의 율법은 이혼 절차의 주도권을 완전히 남편 쪽에 두었고(신명 24,1-4), 아내 쪽에서의 이혼 주도는 아무 데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과 지중해 지역 국가들의 특징이었던 이중적인 결혼과 이혼의 표준이었다. 이러한 이중적 표준이 율법 안에 가미되면서 '수치스러운 일'의 기준을 놓고 그들 사이에 논쟁을 벌이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잘못된 관습을 가지고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예수님께 곤욕스러운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 법을 제정해 준 것이다.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5-9).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시기보다는 이혼 자체를 부정하신다. 부부에 있어서 누구에게 그 주도권이 있든지 간에 부부가 서로 헤어진다는 그 자체를 거부하신다. 당시에 예수님의 이 답변은 그들에게 신성한 혼인제도의 새로운 법령이기도 하였다.
모세 시대의 결혼풍습을 보면 일부다처제와 축첩제, 구매결혼, 전쟁포로와의 결혼, 노예결혼, 이혼 등이 허용되었다. 당시에 율법은 이러한 잘못된 풍습을 발생시키거나 권장하지는 않았으나 지속적인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즉 잘못된 폐습을 막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다. 원래 율법의 정신은 방종의 구습을 제한하고 약자와 여자를 보호하였으며, 전통적인 제도의 악습을 최대한 제한시킴으로써 더 나은 방향으로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전통적인 제도의 악습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일부 특권층의 좋지 못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원래의 율법정신을 되살려 율법의 새로운 해석으로 깨끗한 혼인 정신을 일깨워주신다.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셨음을 말씀하신다. 창조설화는 하느님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창세 2,18).
하느님께서는 모든 동물들보다 뛰어난 사람, 즉 남자에게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인 여인을 그와 대등한 협조자, 짝으로 주신다. 그리고 성서는 이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창세 2,23).
창조설화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땅을 지배하고 자식을 낳아 번성하기 위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란 곧 '한 몸'인 부부를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좋은 율법을 주셔서 당신의 백성을 교육하시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혼인제도의 원형과 거리가 먼 고대인들의 그릇된 관습을 율법의 혼인제도에 가미시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창세기에 제시된 창조주의 계획에 의거하시어 혼인의 불가해소성과 절대성을 단언하신다.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 대전에서 '한 몸'이며, 또한 마땅히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굳을 대로 굳어진 마음 때문에' 묵인되었던 아내를 버리는 일도 이제 완전한 상태를 회복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어떠한 경우든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에 대한 새로운 법이 그렇게 단호하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제자들이 집에 와서 예수님께 이 말씀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
이제 '수치스러운 어떠한 일'도 예외 없이 이혼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이든지 간에 자기 아내나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신다.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이에 대해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새로운 율법, 즉 하느님의 법을 새롭게 완성하시어 선포하시고 가르치신다. 부부란 어떠한 경우든지 간에 남자와 여자가 갈라설 수 없는 '한 몸'임을 분명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혼인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성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님께서 몸소 그 안에 개입하신 결합이다. 혼인성사는 주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혼인성사를 존중하고 지켜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것을 가르치고 계실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중하신다.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4-16).
구약성서에서 어린이는 선천적으로 나약하고 불완전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 출애굽 때는 물론이고 사막에서 체류할 때부터, 어린아이였던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교육적으로 배려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당신을 찬미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에 대해서 하느님과 같은 태도를 취하시면서 어린이들을 축복해주신다. 이는 어린이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주인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어린이는 참된 제자의 상징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인간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고, 하느님 나라를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지 않고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 버린 사람들과 대비해서 순진한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축복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주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다. 오늘 부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특히 어린아이에 대한 표상을 보여주시어 부부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지니기를 바라신다. 부부는 참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