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 성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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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0-28 08:51 조회3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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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지혜 3,1).
11월은 '위령 성월'이다.
위령 성월은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이다. 위령 성월을 맞이하여 잠시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는 죽음! 죽음을 보면 개개인에 따라 다른 인상을 준다. 천수를 누리고 간 성조들의 죽음이 있는가 하면, 모세의 신비스러운 죽음, 사울의 비참한 죽음도 있고, 사고나 질병에 의한 죽음, 요절 같은 죽음도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죽음의 모습들을 보면서 공포와 무서움을 가진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앞에서는 비탄과 통곡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가피한 숙명 앞에서 그 누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인생은 한갖 그림자요, 하나의 숨결이며, 허무일 따름이다.
사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류의 공통된 숙명이며 우리 모두가 언젠가 겪어야 하는 이 불가사이한 죽음을 그대로 넘겨 버릴 수는 없다. 특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초기 이스라엘 신앙, 즉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의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서 뚜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후 세계가 무엇인지, 사후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스스로 죽음의 쓴잔을 받아들이시고,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주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죽음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이 가졌던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서에 보면 이스라엘은 죽음을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땅 구덩이에 묻힘과 동시에 망자는 스올(명부)에 들어가 존속하는 것으로 여겼다. 스올(명부)은 깊은 웅덩이, 적막의 장소, 멸망과 어둠과 망각의 장소이며, 죽은 모든 자들이 이곳에서, 치욕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같은 비참한 운명을 당하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서 명부는 우리가 지옥이라고 하는 영벌의 장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죽음의 세계도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 스올(명부) 역시 하느님께서 지배하신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자기들은 죽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설령 명부에 부쳐진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건져내 주시리라 여겼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육신이 땅에 묻혀 죽는다 하더라도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죽음을 극히 초보적인 방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죽음에서 제외된다는 말이 아니라 죽은 후에 하느님께서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이었고, 반면에 죽는다는 것은 죽은 후에 생명을 다시 얻지 못한다는 신앙이었다.
그리고 후기에 가서 죽음을 깊이 생각하고 체계화하면서 부활이라는 신앙으로 발전시켰다. 의인들, 즉 하느님의 자녀들은 부활을 통하여 다시 살아난다는 신앙이다. 이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이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죽음을 부활 신앙으로 발전시키면서 죽음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론으로써 죽음에 적극 대처했다. 먼저 죽음에 어떤 형상을 부여하여 인격화시켰다. 죽음을 악의 한 세력으로서 인간을 명부에 넘겨주는 불길한 목자로, 집에 몰래 들어와 어린애를 쓰러뜨리기도 하는 악의 존재로, 또한 질병이나 사고를 통하여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과 권력을 가진 왕까지도 시간을 초월하여 죽게 하는 세력으로 여겼다.
성서의 계시는 죽음의 기원과 의미를 설명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신학적으로 가르쳤다. 성서의 가르침을 보면 죽음은 원래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사불멸하도록 창조하셨고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는데, 악마의 시기로 말미암아 죽음이 인간에게 들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느님께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친다. 결국 인간은 이 죄 때문에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죽음이 인간을 계속 괴롭히는 것은 이 세상에 죄가 실재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표징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에 죄가 있는 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고, 명부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저승의 것일 뿐 아니라 이승에서도 활약하는 세력들로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이 세력의 손아귀에 떨어진 이들은 불행한 것으로 여겼다. 결국 삶이란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는 고뇌에 찬 투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서는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지, 또한 죄가 실제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지 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 해답으로 '회개하라'고 가르친다. 회개해야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무죄한 의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의인들이 겉으로 죄인들과 똑같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의인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죽음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이며, 의인들은 절대로 스올(명부)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죄인들에게는 조건이 제시되는데, 죄 때문에 죽어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신다(에제 18,32)고 가르친다. 성서는 죄인이 일단 자신의 죄에서 돌아선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함정에서 빼내주실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설교 중심에도 회개를 촉구하는 외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약의 계시는 인간을 죽음에서 구해내시는 결정적 구원인, 죽음을 쳐부수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한다. 즉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느님께서 애당초 만드시지 않았던 죽음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고, 그때 명부의 먼지 속에 잠자던 의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영원히 참여하기 위하여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며, 악인들은 명부의 영원한 전율 속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신약에 와서 어렵게 여겨지는 죽음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확연히 드러나고 영원한 생명이 실제로 주어지면서 죽음의 실체가 벗겨진다. 종말에 하느님의 나라에서 보게 될, 죽음을 쳐부수는 궁극적인 승리가 실현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으로 태어나시어 우리와 똑같은 죽음의 쓴잔을 받아들이시고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보여주심으로써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다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은 완전히 정복되고, 인간은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부터 이미 죽음의 세력을 이겨 내실 것을 암시하셨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 내시는 사건과 죽은 나자로를 살려 내시는 사건, 그리고 죽음의 세력인 질병과 중풍병자와 나병환자 등과 같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악령을 쫓아내신 기적들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회개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절대 죽지 않고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표징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의 세력에 놓여 있는 이 세상에 오셔서 맨 처음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였다. 회개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으며,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간과 죽음의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분명하게 설명되고, 두렵고 무서운 죽음은 새 생명을 얻는 사건으로 전도된다. 죽음이 인간을 이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음을 이긴 것이다. 비록 인간이 죄의 상태에서 죽음의 세력에 놓여 있을지라도 회개를 통하여 죽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승리는 모든 이들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때에 찬란하게 완성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력으로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죽음을 이기신 분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길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총이 은혜롭게도 성사 안에 내재되어 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총 안에 살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에서 회개하고 성사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된 삶은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체성사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절대 죽지 않을 뿐더러, 설령 명부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을 살려주실 것이다. 더욱이 회개의 성사인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잘 받는다면 분명히 성사적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얻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세력이 넘치는 세상에서 나약하고 탐욕스러운 삶으로 즉시 생명을 얻지는 못할지라도(연옥 교리) 언젠가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부활 개념-부활 대축일 참조)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11월은 특별히 죽은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달이다.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며 아직 연옥에서 부활의 희망을 안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육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요한 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