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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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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마르 12,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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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1-04 08:55 조회3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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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헌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마르 12,43).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으로, 탐욕스러운 율법학자들의 겉꾸밈과 가난한 과부의 깊은 믿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을 얼마 앞두시고 하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그 의미가 매우 깊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 당신을 송두리째 바치시는 십자가상 봉헌의 뜻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먼저 율법학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대단히 비판하신다. 원래 율법학자들은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 신앙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바빌로니아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서를 다시 정리하고, 계명과 윤리를 깊이 반성하고 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이들은 오직 성전을 관리하면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연구하고 정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모세오경을 만든다. 그런데 B.C. 200년경에 사라진, 그들이 갖고 있던 성서적 전통의 학문과 가르침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들이란 율법박사나 또는 법의 집행을 맡은 재판관에게 법적 충고를 해주는 율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율법학자로서의 순수성을 잃고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충고해주는 직업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학문과 지식, 율법교사의 신분으로서 그들이 끼치는 악행은 대단히 심각했다.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그들의 생활과 행동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께로부터 크게 책망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드러내놓고 그들을 조심하라고 충고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악한 행동을 비교하시면서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마르 12,41-44).

가난한 과부는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렙톤 2개를 넣었지만, 자기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가난한 과부는 자기 생계를 위한 마지막 렙톤 2개를 헌금궤에 넣는 빈 마음을 보인 것이다. 대부분 많은 부자들은 그들의 너그러움을 과시하려고 헌금하면서 오만과 교만함을 보이지만 그 가난한 과부는 마지막 한푼까지도 다 바치는 정성을 보여준다.

오늘 가난한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구약성서에서도 비슷하게 나오는데, 제1독서에 나오는 사렙다 마을에 사는 과부의 이야기이다. 그 과부는 자기의 가난한 처지를 이렇게 말한다.

"군 떡이 없습니다. 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워다가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1열왕 17,12).

사렙다는 지중해 해변가에 위치해 있으며, 시돈에서 약 9.6km 떨어진 남쪽에 있다. 사렙다 는 B.C. 14세기의 파피루스에 언급되어 있다. 이 성읍은 훌륭한 유리 제품으로 유명한데, 그것들은 시돈 근처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종류의 모래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예언자 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렙다로 보내어 머물게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에서 어떤 가난한 과부의 도움을 받아 머물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그 가난한 과부는 비가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복을 받는다. 이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것이라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것을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라 하여 엘리야에게 음식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살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과부에 대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바쳤다고 말씀하신다. 가지고 있는 모두를 바치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당신 전부를 아버지께 바치고자 하시는 전형이다. 진정한 헌금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는 데 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헌금은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 특히 과부나 고아들을 돕는 자원봉사로 구약시대와 유다교 초기 100년 동안 매우 강조되었다. 그리고 사도 시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인들은 대부분 이런 도움을 필요로 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고, 이스라엘 사회는 불안과 혁명적인 경향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갈릴래아 출신의 그리스도교인들과 과부가 많았고, 핍박과 기근이 궁핍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힘닿는 데까지 헌금을 걷어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교회들이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에 동의하고 권장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많은 서신들은 바오로와 그의 일행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의 궁핍을 덜기 위해 이방인 교회에서 많은 헌금을 가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헌금이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에 동참하면서 가난한 형제들을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계명 다음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중요시하면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금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든 이가 전부를 바쳐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만 헌금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은 자선의 실천에서 면제받은 사람인 양 모르는 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비록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며 부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사람들이다. 쓰고 남아도는 것, 없어도 되는 것을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가난한 과부에게 렙톤 2개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전부인 것처럼, 자신에게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어줄 때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성체성사는 곧 나눔의 신비이다. 성체성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나누면서 우리의 전부를 바쳐야 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