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복음: 요한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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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2-23 08:58 조회2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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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빛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말씀이 곧 참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한 1,9).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날이다. 하느님께서 2천 년 동안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소원을 들어주신 날이다.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좀 알아듣기 어려운 요한 복음 사가가 말하는 ‘말씀과 빛’에 대한 주제이다.
먼저 복음은 말씀이신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게 전한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요한 복음 사가는 ‘말씀’에 대해서 말하는데,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계셨고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미 ‘말씀’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체험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사막에서 하느님이신 말씀과 함께 생활하였고, 성소와 장막에서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을 대면하였다. 구약성서에서 말씀이신 하느님은 철학처럼 추상적인 사건에 의한 만남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직접 말씀이신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었다. 그리고 구약성서는 서서히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것을 예고하면서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다는 사실을 핵심적인 계시로 준비하였다. 구약성서의 목적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요한 복음 사가는 말씀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예수님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존재하신 ‘말씀’이요, 하느님이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천지 창조와 역사의 과정에서 말씀이신 하느님은 결국 예수님에게서 완성되고 집약된다.
요한 복음 사가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3-8).
요한 복음 사가는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에게서 세상 모든 것이 생명을 얻었음을 말하면서 그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었고, 그 빛이 세상 모든 어둠을 비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빛에 대한 주제는 성서 계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난다. 어둠에서 빛을 주신 일은 창조 설화에 나오는 창조주의 최초의 행위였다. 그리고 묵시록에서는 구원 역사의 마지막에도 새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 자신이 빛이 되어 오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빛은 하느님의 본성의 일면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표시였다. 즉 빛은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빛은 하느님의 현현을 표현하는 문학적인 양식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빛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적으로 표시할 뿐만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빛에 관한 예언자들의 약속은 예수님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전교를 시작하셨을 때 이미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 9,1)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소명도 이 같은 예언자들의 말을 근거로 삼고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나는 너를 이방인의 빛으로 삼았으니 너는 땅 끝까지 구원의 등불이 되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사도 13,47).
예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 말씀과 행위로써 당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계시하셨다. 소경의 치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셨다. 또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요한 12,46)라고도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비추는 것은 예수님 자신 속에 빛의 근원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 그 자체이시고, 빛이시며, 생명이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된 빛이셨다.
복음은 다시 이렇게 전한다.
“말씀이 곧 참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은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요한 1,9-13).
요한 복음 사가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을 비추어주셨는데도 사람들이 빛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빛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어둠과 빛의 대립을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윤리적인 차원에서 부각시킨다. 즉 빛은 선과 의로움의 나라로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의미하고, 어둠은 악과 불 신앙의 나라로서 사탄의 나라를 가리킨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이 둘 사이에 끼어서 ‘빛의 자녀’가 되든지, 아니면 ‘어둠의 자녀’가 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빛의 자녀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빛의 자녀다운 생활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우리가 몸의 등불인 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빛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바오로 사도 역시 같은 사실을 자주 권고하였는데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선한 것, 올바른 것, 진실한 것은 ‘빛의 열매’이며, 모든 종류의 죄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행실이다’라고 윤리적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빛이신 주님과 일치하여 머물러 있으려면 빛 속에서 살아야 한다.
요한 복음 사가는 다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 1,14).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에게서 보여진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빛나던 빛은 하느님 자신의 영광의 빛이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2-3).
오늘은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시어 세상에 빛을 주신 날이다. 인간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날이다. 이제 세상에는 어둠이 사라지고 생명이 주어지게 되었다. 하느님의 크신 축복과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이시며 빛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오늘, 온 세상에 큰 축복이 넘치기를 바라면서 특별히 소외된 이들에게 큰 빛이 주어지기를 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