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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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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복음: 루카 2,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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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2-23 08:59 조회3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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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가정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교회가 특별히 나자렛 성가정을 묵상하고 본받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다. 교회는 17세기 이후부터 성가정에 대한 공경과 신심 운동을 강조하면서 세상의 모든 가정이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기도하여 왔다.

가정은 가족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키되 오직 물질적인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안정과 사랑을 제공하는 보금자리를 말한다. 따라서 가정의 핵심은 가족이며, 가정의 목표는 가족들의 행복과 복지 향상이다.

가정, 즉 집의 개념은 무엇인가? 성서에서는 인간의 행복과 안식, 그리고 사랑을 주는 가정과 집을 히브리어 ‘바이트’(Bayth), 또는 합성명사인 ‘베델’(Bethel, 하느님의 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가정은 하느님의 집이다. 따라서 성서는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정을 행복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보금자리이며,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지붕으로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율법을 보면 집(가정)을 보호해주는 엄격한 규정이 있는데, 누구도 집을 앗아갈 수 없고 그것을 탐내서도 안 되며 행복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은 비록 성스러운 전쟁이라 할지라도 집을 새로 지은 사람에게는 출전을 면제해주는 매우 인간미 넘치는 법규정을 집어넣고 있는데, 신명기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새 집을 짓고 그 집을 아직 하느님께 봉헌하지 못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거라. 싸움터에 나갔다가 죽어, 남이 그 집을 봉헌하게 할 수야 있겠느냐?”(신명 20,5)

성서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담장을 쌓아 올린다는 뜻이 아니고 한 가정을 이루고, 후손을 낳아서 그에게 종교 교육을 베풀고 덕의 모범을 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서는 이것이 바로 지혜의 업적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덕 있는 아내가 있어야 하고 아무도 그를 대치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가정은 하느님의 업적으로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집에 불행을 초래할 수 있으며, 죄로 인해서 가정을 파괴하고, 또 다른 파괴를 초래하는데 인간 자신의 파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 품 안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신다.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당신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가 갈라짐으로 불행을 초래한 인간에게 당신께서 친히 함께 사시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의 업적인 구원의 역사를 보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정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출하시어 시나이 산에서 백성들과 가족으로서의 계약을 맺으셨고, 성소와 장막에서 당신 백성들과 함께 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한 가정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는데 이 약속의 땅 전체가 ‘야훼의 집’이었으며, 야훼께서는 그 땅을 당신 백성(가족)들이 안주하는 집으로 삼으셨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함께 사시는 집은 ‘성전’(나해-사순 제3주일 참조)이 되었으며, 이 성전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즉 교회가 되고 성체성사의 신비로 한 몸을 이루는 거룩한 가정이 된다. 따라서 가정은 좁게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가정이며, 넓게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교회이다.

‘하느님의 집’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초월적이고 영적인 신비가 확연히 드러나고 설명되어졌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탄생하실 때부터도 당신이 거처할 집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자렛 부모의 집에서 사셨지만 이미 열두 살 때에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곳에서 그분은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집이 어떠한 집인지를 말씀하셨고, 건물로 된 성전이 허물어질 날이 올 것을 예고하시면서 영적으로 세워질 하느님의 집, 즉 성령에 의한 ‘교회’(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 가정)를 암시하셨다.

하느님의 집인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세워지고 성체성사 안에서 성사적인 신비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가정은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실 때 성가정이 된다.

성가정 대축일인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 이야기인데,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보내신 30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 중 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루카 2,41-42).

열두 살이 되어야만 예루살렘에 올라가 과월절 행사에 참가할 수 있다는 율법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명절에 참여하셨다.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과월절 행사에 참여하신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일행 중에 끼어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2,43-48).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지혜에 대한 학자들의 경탄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인 사명 의식을 드러내셨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학자들과 무엇을 토론하셨는지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경탄은 열두 살의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지혜를 보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만에 겨우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께서 지혜로 충만하시고, 신적인 은총을 소유하고 계셨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하고 말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루카 2,49-52).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당신이 하느님과 가족 관계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의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에 메시아적 의식에 도달하셨음을 중요하게 전하고 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인 마리아는 하느님의 현의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지만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신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기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유년시절을 그리 많이 전하고 있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메시아적 의식에 도달하실 때까지 사상의 과정을 신학자들에게는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 사가들은 이를 결코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신성은 발전 단계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실 때부터 이미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만 메시아로서 활동 시기가 다를 뿐이었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께서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활동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가정 한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주님께서 가족과 함께하실 때에 성가정이 된다.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가정,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가정은 하느님 나라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모두는 성가정을 본받아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성가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하시는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골로 3,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