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복음: 루가 4,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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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1-24 14:03 조회2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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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바랍니다.
전례력에 따라 '주님 봉헌 축일' 복음 말씀(루카 2,22-40 또는 2,22-32)해설을 올려드려야하지만,
'빛을 주시는 예수님 3' 내용에 따라 연중 제4주일 복음 말씀(루카 4,21-30)해설을 올려드립니다.
1월 27일(월) 구정연휴 관계로 좀 더 일찍 업로드합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는 예수님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 복음에 이어 예수님의 고향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어 성서를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시자 사람들이 탄복하면서 예수님을 칭찬하였다. 예수님께서 읽으시고 가르치시는 말씀에 놀랐던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서의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셨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1-24).
예수님께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당신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말씀하시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가르침에 탄복을 하면서도 정작 그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인간적인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잘 아는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의식적으로 배척하였다(나해-연중 제14주일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시고 “사실 어떤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시면서 예언자들이 받았던 박해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은 고향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받았다.
그러면 예언자들은 누구인가? 이번 기회에 예언자들의 신원과 직무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이집트나 가나안,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고대 근동 지방에는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주문을 외우고 점을 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예언자’ 혹은 ‘신의 종’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고대부터 중대한 일을 하기에 앞서 왕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들었으며 그들에게 조언을 청했다.
이스라엘에도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예언 활동을 하였는데 그들은 고대 근동 지방의 예언자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예언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예언자 칭호가 부여된 것이 성서적 예언 현상의 기원이긴 하지만 하느님의 사자로서 대표적 인물은 역시 모세였다. 그는 예언 직무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예언자들의 원조 격이었다. 그리고 판관 시대 말기에 ‘예언자들의 후예’(예언직 종사자)라는 무리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의 별난 행동은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의 예언 현상과 같은 인상을 갖게 하였다. 바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비’(Nabi, 불리운 자)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아울러 ‘선견자’라든지, ‘통찰자’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러다가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야훼 하느님의 참 예언자에게는 ‘나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사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들이지 고대 근동 지방의 예언자들처럼 자기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를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내 말이라 하고 전하는 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내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이다. 제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면서 너희를 속이는 것들이다’”(예레 23,16).
예언자들은 애초부터 하느님께로부터 압도되어 하느님의 영으로 활력을 얻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말씀해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들의 소명을 다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라든지 사무엘, 아모스, 이사야, 에제키엘, 예레미야의 소명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언자들의 예언 직무는 이스라엘 전통을 확립해 가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뚜렷한 위치를 확보해 갔다. 예언자들의 예언 직무를 보면 율법과 계약의 준수가 우선이었다. 예언자들은 우선 율법과 계약을 거스르는 행위를 고발하면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호세아나 예레미야는 십계명에 호소하였고, 에제키엘은 율법과 전통의 관습에 호소하였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옛날에 하느님께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맛보았던 행복했던 시절을 현실에서 실현시켜 보고 싶어 하는 복고 정신을 가졌다. 엘리야는 호렙 산으로 돌아갔고, 호세아와 예레미야는 사막의 추억을 열광하였다. 제2이사야는 이집트 탈출에 대한 추억에 황홀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과거와 그 잔해에 빠진 감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과거 하느님과의 행복했던 관계를 회상하면서 하느님께 더욱 충실하고 성실할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예언자들은 희생 제사와 계약의 궤에 대해서, 또는 성전에 대해서 모독하는 자들에게 모진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에서 모독적인 행위를 계속할 때 여지없이 힐난하였고, 예언자적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가끔 큰 시련을 겪었다. 즉 많은 사람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박해와 고통을 당하였다. 특히 가까운 고향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자기들을 비호하지 않고 가차 없이 질책한다는 이유로 더욱 배척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예언자들은 때로는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아합 시대에는 집단으로 피살된 일이 있었고, 므나쎄와 여호아킴 시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느헤미야 시대에도 예언자를 살해했었다. 그때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인에게 주어졌음을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두 가지 이야기를 들어 하느님의 구원이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믿음을 가진 이방인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주어졌음을 말씀하신다. 유다인들에게 제시된 메시아를 배척하는 이스라엘을 떠나 모든 민족에게 주어졌음을 가르쳐주고자 하셨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루카 4,25-27).
예수님께서는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과 기근이 극심할 때 엘리야 예언자를 정성스럽게 맞아들인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었던 이야기(나해-연중 제32주일 참조)와 예언자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나아만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 하권 5장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나아만은 시리아군이 다마스커스에 있었을 때 시리아군의 군사령관으로 있었다. 당시에 시리아 왕은 벤 하단 2세로 추측되지만 여기에 관련된 이스라엘 왕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아 그 사건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엘리사 예언자가 활동하였던 시대라고만 알려지고 있다. 나아만이 격리되지 않고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면 그의 나병은 전염성이 별로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느님께서는 나아만을 선택하셨고 엘리사를 통하여 그의 병을 낫게 하셨다. 나아만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감격하여 “이제부터 저는 야훼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2열왕 5,17) 하고 유일하신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였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과 불충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발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이 불충한 이스라엘을 벗어나 충실한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이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카 4,28-30).
루카 복음 사가는 모든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벌써부터 예수님의 운명, 그분의 삶이 가져올 비극적인 죽음을 암시했다. 훗날 야훼의 종으로서 마치 어린 양이 살해당하듯이 죽음을 당하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그려 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유유히 당신의 갈 길을 가시며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처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방해와 박해를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가서도 안 된다. 많은 예언자들과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방해와 박해, 그리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