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일(복음: 루카 6,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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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2-24 14:41 조회2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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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이란 무엇인가?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루카 6,42).
오늘은 연중 제8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위선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주 복음에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다시 율법에 나오는 복수법에 대해서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남을 비판하지 마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 뒤에 오늘 복음인 위선적인 삶을 살지 마라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 만큼밖에는 되지 못한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루카 6,39-42).
위선에 대한 책망은 이미 구약에서도 예언자들과 현자들을 통하여 자주 주어졌으며, 위선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생활의 가장 큰 악으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과 현자들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위선의 근원과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특히 그 당시에 지식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적인 삶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셨다. 위선자란 원래 그 행동과 마음속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먼 사람, 즉 소경이라고 부르셨다. 위선자는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소경이 되는데, 그들이 다른 사람을 속이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속임으로써 소경이 되어 빛을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종교적인 위선이란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종교적 행위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속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위선은 하느님을 위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자선, 기도, 단식 등과 같은 가장 권장할 만한 종교적 행위도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 집회서에 이렇게 나온다.
“주님 두려워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라. 주님을 두려워하되 안팎이 같아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행하지 말고 네 입술을 조심하여라”(집회 1,28-29).
신약에서 위선의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율법의 법조문을 들어 이를 교묘히 이용하고, 말과 행동 사이에 나타나는 위선의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는 방법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큰 죄는 그냥 삼켜버리면서 백성들의 사소한 잘못은 그냥 넘기는 일없이 걸러내고, 하느님의 계명을 자신들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이용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도 위선적인 탈을 쓰고 율법에 올가미를 씌우려 하였다.
형식주의는 고칠 수 있으나 위선은 마음을 완고하게 하기 때문에 고치기가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남을 믿게 하려는 위선적인 자기 자신을 진실된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회개하라는 외침에 귀머거리가 되고 자기들은 회개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위선자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자기의 배역을 계속하며 높은 지위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의 위선은 더욱더 깊어진다.
세상에 종교적 지도자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인간의 인습과 자신의 말로 바꾸려 한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는 위선자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위선자들은 눈먼 길잡이며, 그들의 가르침은 나쁜 누룩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악함 때문에 눈이 멀게 된 자들은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하시면서 스승은 오직 주님이시며 당신만을 따라가야 함을 가르치셨다.
위선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이미 공관 복음서는 군중에게도 위선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유다인을 공격하면서 모든 시대의 불 신앙인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역시 위선자가 될 위험이 더 있다. 베드로조차 안티오키아에서 바오로 사도와 토론할 때 잠시 위선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갈라 2,13-14). 거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의 가식적인 행동에 면박을 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은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형제에 대한 충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충고해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형제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데만 정신을 쏟는다면 자신의 큰 잘못은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루카 6,43-45).
사람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하다. 착하고 선한 마음에서 선한 말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가 빛을 발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곧게 하는 데 온 힘을 써야 한다. 마음은 그리스도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뿐이라면 아무리 기도의 형식을 빌려 찬미를 드린다 하더라도 빈 껍질에 불과하다. 사람은 말과 행동이 항상 일치해야 하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밝혀주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사람의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체질을 하면 찌꺼기가 드러나듯이 그 사람의 결점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질그릇이 가마 속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말로써 수련된다.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를 기른 사람의 기술을 나타내듯이 말은 사람의 마음속을 드러낸다”(집회 27,4-6).
말이란 참으로 중요하다. 말이란 의사소통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진리를 밝히고 깨닫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며,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에 못지 않게 악이 될 수도 있다. 거짓을 유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이 된다. 형제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무수한 억측과 비방을 생각한다면 말이란 무서울 정도이다. 성서는 자신의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흠만 보는 사람들,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 아무런 생각 없이 뱉어 버린 말 한마디로 형제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기심으로 타락한 사람들, 세상이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차 오염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곧게 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곳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당신의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게 하신다. 우리 모두는 아무런 차별 없이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서로 존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선해지고, 선한 마음에서 선한 말이 나오게 되며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된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