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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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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복음: 마태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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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3-03 09:13 조회272회 댓글0건

본문

 

단식할 때의 마음가짐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아라”(마태 6,16).

 

오늘은 ‘재의 수요일’이다.

교회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오늘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거행하면서 속죄의 시간을 갖는다. 이는 재가 참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재는 고대의 종교에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는데 그 근원적인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의견이 있다. 성서에 ‘먼지’를 ‘재’로 번역하고 있는 곳도 있듯이 재는 종종 먼지와 연결되어 생명이 없는, 타고 남은 찌꺼기로 인간의 죄와 나약함을 상징하였고 죄인의 마음을 재로 비교하기도 하였다. 집회서는 “그의 마음은 마치 타고 남은 재와 같고 그의 희망은 먼지보다 더 천하며 그의 생활은 진흙보다도 더 가치가 없다”(지혜 15,10)라고 하였고, 에제키엘서는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 “너는 땅위의 잿더미로 남아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리라”(에제 28,18)고 하였다. 또한 집회서를 보면 자기의 죄를 자각하는 죄인들을 자신이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이라고 하였고, 그 확신을 타인이나 자신에게 나타내기 위해 재위에 앉아서 머리에 재를 뒤집어쓴다고 하였다.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외적으로 약하고 허무한 자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행동이며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여 자비를 얻고자 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성서는 재를 얹으면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여 죄와 죽음을 이겨내고 벗어나도록 가르쳤다. 이처럼 재를 얹음은 구약에서부터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몸짓으로 나타내는 죄의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오늘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와 함께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죽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묵상한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복음은 역시 선행에 대한 것으로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한 가르침이다. 금년에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선행 중에서 지난해에 이어 마지막으로 단식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아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8).

단식은 자기 헌신 행위(나해-연중 제8주일 참조)로써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참회하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하며 충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단식 역시 자선과 기도와 더불어 덕을 쌓는 종교 생활의 3대 지주의 하나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식에 대한 의미보다는 단식하는 사람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서 가르치신다. 

단식은 자선과 기도와 마찬가지로 내적인 속죄 행위이기 때문에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 보이기 위한 침통한 표정이 아니라 얼굴은 씻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제1독서에 요엘은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야훼의 말이다,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요엘 2,12-13).

단식은 고대로부터 금욕과 정화, 탄원과 속죄 행위로서 종교 의식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이슬람교에서는 단식을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믿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겼다. 성서 역시 여러 종교 사조와 일치하면서 단식의 의미를 명백하게 하고, 그 실행 방법도 분명하게 규정하였다. 특별히 자선과 기도와 병행하는 단식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비천함과 믿음과 사랑을 드러내는 중요한 행위의 하나라고 가르쳤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속죄와 참회는 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단식처럼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있기에 때로는 내적인 마음을 외적으로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혼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행동과 자세를 외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 모세나 엘리야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40일간 단식하면서 기도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메시아로서 활동을 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단식하신 것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행위로서 메시아로서의 임무를 시작하시려는 것이었다.

과거 유다인들의 전례에서 속죄의 날은 ‘대 단식일’이었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둘째 날과 다섯째 날에 단식을 하였고 더 독실한 사람들은 그 이상의 기간을 단식했다. 예수님 시대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는데,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규정한 의로움을 일부 단식으로 성취하려 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형태의 단식을 명하지 않으신 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규정한 의로움을 경시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을 실천한다고 나팔을 부는 것을 금하시고, 더 차원 높은 내적 의로움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분께서는 속죄 행위에 있어서 한 걸음 더 나가 위선적인 단식보다는 재물에서의 초연, 자발적인 금욕, 그리고 무엇보다 자아 포기를 역설하셨다. 실제로 당시에 단식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 위선적인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다. 예언자들이 질책한 형식주의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단식일 경우 생기는 오만과 자기 과시의 위험이 그것이었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단식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위선적인 믿음으로 빠지게 하였다.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참된 단식은 오직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야 하고, 진정한 의로움을 추구해야 하며, 기도와 자선에서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참된 단식은 기도와 자선과 함께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남몰래 하라고 하신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인 유다교의 단식 관습을 이어받아 실천하였으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단식의 정신을 완성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단식과 기도를 포함하는 속죄를 위한 전례 행사가 나오는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 전통에 충실하면서 엄격한 단식을 통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채비를 하였다. 바오로 사도 역시 사도로서의 무거운 책무에 눌리면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이겨 내었다.

단식은 하느님 앞에 나가는 속죄 행위로서 가장 좋은 덕목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단식은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앞에서 단식의 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잔칫집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그들을 단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때가 오면 신랑을 빼앗길 것이니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을 할 것이다”(루카 5,34-3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함께 당신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고 당신을 믿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회개를 위한 단식은 교회의 생활에서 그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뉘우쳐야 할 일들이 많이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멀어졌던 일들이 많이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단식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신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율법에서처럼 단식을 자주 하지는 않더라도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재의 수요일 단식에 참여해야 한다. 속죄와 참회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배우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란다.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