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복음: 요한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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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3-31 08:44 조회2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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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8,11).
오늘은 사순절 제5주일이다.
이제 두 주간만 지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과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는 부활절이 돌아온다. 사순 시기의 절정이 되는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양면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일어나는 의미 깊은 이야기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실 때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자 군중들은 예수님께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보자 저마다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또는 “저분은 그리스도이시다” 하면서 예수님을 따랐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막아 보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이 성전 경비병들에게 “어찌하여 그를 잡아오지 않았느냐?” 하고 다그쳤지만 군중들의 동요가 무서워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다음날 다시 성전에 나타나셨을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음한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들이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워 많은 군중들 앞에서 곤궁에 빠뜨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때는 초막절이라 예루살렘 성전에 매우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어떤 날인가? 초막이란 짐승이나 사람을 위해 만든 일시적인 은신처인데 특히 광야에서 생활하거나 전쟁터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초막은 나뭇가지를 서로 엮어서 만들었다. 초막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농경 생활에서 시작한 것으로 올리브 과수원 주인들이 수확의 달(9월)이 되면 밤마다 가지와 덩굴로 만든 오두막에서 올리브 밭을 감시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초막절은 농사력이 끝나는 가을에 큰 수확의 기쁨을 가지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명절이었다가 점차 하느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는 절기 중의 하나로 바뀌어졌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절기들이 나오는데 대부분 농사에 관계되는 절기들이었음을 볼 수 있다. 출애굽기에 “너희가 밭에 씨를 뿌려서 지은 곡식의 맏물을 바치는 맥추절을 지켜라. 또 농사 지은 것을 밭에서 모두 거두어들이는 연말에는 추수절을 지켜라”(출애 23,16-17), 또는 “밀곡식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 추수절을 지켜라. 해가 바뀔 때(가을에), 추수절을 지켜라”(출애 34,22)라고 나온다.
초막절이 언제부터 광야 생활의 상징으로 하느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는 절기가 되었는지는 역시 명백하지 않지만 유다교에서 보편화된 절기가 된 것은 바빌론 유배 이후이다. 유배 이후 디아스포라(Diaspora, 분산; 유다왕국이 패망하여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뒤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된 유다인들)는 초막절을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기회로 삼았다. 초막절이 돌아오면 순례자들은 바빌론, 혹은 보다 먼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으며, 그때 그들은 성전과 도성을 위해서 그동안 모은 봉헌 물들을 가지고 왔다. 초막절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더욱 많이 모여들었던 것은 성서에 나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즈가리야서를 보면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경배를 드리러 온다는 종말론적인 환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러한 일들이 초막절에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다. 즉 마지막 때에 ‘유다인들을 한데 불러모은다’는 유다교의 메시아적 희망이 초막절에 이루어진다는 전통적 신앙이다.
“예루살렘에 쳐들어왔다가 살아남은 백성은 모두 해마다 올라와서 초막절을 지키며 야훼를 만군의 주로, 왕으로 받들어 예배하게 되리라”(즈가 14,16).
초막절 행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경우에 따라서 이틀을 연장했다고 한다. 초막절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주어졌는데 그중에 특히 7일 동안 먹고 자고 해야 할 초막을 준비해야 했다. 따라서 초막은 초막절을 지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었다고 한다. 초막절 공동 의식은 주로 밤에 거행되었으며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이사야는 밤의 거룩한 절기를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밤에 거룩한 축제를 베풀어 노래 부르고 피리를 불며 이스라엘의 바위, 야훼의 산으로 올라가며 마음이 기쁘리라”(이사 30,29).
초막절의 장엄한 종교 의식은 새벽에 제사장들에 의해서 거행되었고 이 의식은 7일간의 축제 기간 동안 매일 행해졌다. 그리고 연장된 여덟째 날에는 야훼 하느님의 위대하신 역사하심을 기리는 할렐(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레위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의무의 일부였음)을 불렀고, 아홉째 날은 심하트 토라(Simhath Torah, 율법의 기쁨)라고 불렀는데 이는 절기의 초점이 율법으로 옮겨진다는 표시였다. 즉 이때부터 율법의 낭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초막절의 7일간은 명절의 분위기에서 지냈고 연장된 이틀간은 종교적인 행사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면서 광야 생활의 계약을 다시 새롭게 하는 율법을 낭독하였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을 크게 강조하는 초막절에 율법학자들이 율법에 돌로 쳐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와 올가미를 씌우려고 한 것은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오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요한 8,1-6).
그들이 들고 나온 간음에 대해서 구약의 율법은 “약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를 다른 사람이 성읍 안에서 만나 같이 잤을 경우에는 둘 다 그 성읍 성문 있는 데로 끌어내다가 돌로 쳐 죽여야 한다”(신명 22,23-24)라고 언급하고 있다.
율법에서 간음은 중죄였다. 당시에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교사들은 간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당시의 도덕적인 해이에 대해서 엄격하게 가르쳤고 간음하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음죄에 대해서 죄를 지은 자는 현장에서 잡혔을 때만 죽음의 처벌에 순응하게 되어 있었고 직접적인 법적 증거를 잡기가 곤란할 때는 랍비에 의해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간음한 자를 현장에서 잡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하면서 잡아온 그들의 모습이 어쩐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우리 역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도대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난처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올가미에 걸려든 것으로 생각하고 재촉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긴 침묵 끝에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8,7-11).
아무리 율법에 충실하고 잘 지킨다 할지라도 스스로 돌을 들어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사실 의로운 사람은 남을 단죄하기 위해 돌을 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군중들은 하나하나 자리를 떠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은 다 어디 갔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하고 대답한다. 그 여자의 대답은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에서 오는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님께서 간음죄를 정당화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을 돌려보내시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죄로 인한 치명적인 삶에서 구원하시어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 것이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을 엿볼 수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