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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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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금요일(복음: 요한 18,1-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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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4-14 08:49 조회1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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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재판한 유다인 최고 법정 ‘산헤드린’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이사 53,5).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이다. 교회는 오늘 주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예식만을 거행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오늘, 교회는 요한 복음 사가가 전하는 수난사를 장엄하게 읽는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어떻게 죽으시고 묻히셨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 사가는 오늘 주님의 수난사를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가셨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끔 거기에 모이곤 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잡아줄 유다도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과 함께 한 떼의 군인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요한 18,1-3).

예수님의 수난사는 유다의 배반으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잡혀 대사제에게 끌려가시는데 요한 복음은 “그때에 군인들과 그 사령관과 유다인의 경비병들이 예수를 붙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요한 18,12)라고 전하고 있다. 당시에 대사제는 가야파였는데 요한 복음 사가는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으신 것으로 전하면서 실질적인 대사제의 권한이 안나스(나해-성금요일 참조)에게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공관 복음인 마태오 복음 사가는 대사제 가야파에게 끌고 갔다고 전하고, 마르코 복음 사가나 루가 복음 사가는 대사제의 관저로 끌고 갔다고 전하고 있다. 대사제의 관저란 유다인의 최고 법정을 말한다. 루가 복음 사가는 유다인 법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들을 비롯하여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법정을 열고 예수를 끌어내어 심문하기 시작하였다”(루가 22,66).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대사제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법정을 열어 심문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은 이 법정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유다인의 최고 법정은 어떤 곳인가? 당시 유다인의 최고 법정을 ‘산헤드린’이라고 불렀는데 일명 ‘공회’, 또는 ‘의회’라고도 불렀다. 산헤드린은 예수님 시대와 그 이전에도 예루살렘에 있었던 70명으로 구성된 유다인의 최고 법정이었다. 산헤드린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별로 없다. 유다인의 전통에 따르면 모세가 이를 구성했으며 바빌론 유배 이후에 에즈라가 재조직한 것으로 나타난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자치하에 장로들의 회의가 지배했다. 그 회의 의장은 세습적인 대제사장이었고 그 회의를 일명 ‘게루시아’라 불렀는데 이는 ‘귀족 회의’를 뜻하였다. 이 귀족 회의가 유다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으로 발전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은 로마의 보호 정치 아래 유다인의 가장 큰 세력이었으며 국가의 내무 행정이 실제적으로 여기에 속해 있었다. 종교적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인들) 사이에서까지 산헤드린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산헤드린은 훗날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없어졌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쉬레르에 따르면 아킬라오 시대로부터 헤로데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산헤드린의 시행 권한이 전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다 지방에만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당시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남아 계셨더라면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재판할 권한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으면 당신의 죽음을 충분히 피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이다.

당시에 ‘산헤드린’의 구성원은 대제사장들(임직 대제사장, 전직 대제사장. 대제사장을 배출한 특권 있는 가족의 일원들)과 장로들(족장, 가장, 제사직), 서기관들(법정인, 입회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었다. 루가 복음에 “의회 위원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루가 23,50)라고 나오는데 이는 그가 산헤드린 의원이었음을 말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임직 대제사장이 항상 회장직을 맡았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는 가야파가 재판장(요한 복음 사가는 대사제 안나스가 실질적 권한이 있었음을 말함)이었고, 바오로 사도를 재판할 때는 아나니야가 재판장이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대제사장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에서 주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바리시아파 사람들이 득세하면서 그들이 점점 더 많이 산헤드린의 의원으로 참석했다. 예수님 시대에 산헤드린은 공식적으로는 사두가이파인 대제사장(당시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모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었음)이 이끌어 갔으나 실질적으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배했다.

예수님 시대에 산헤드린은 로마의 보호정치 아래 유다인의 독립적인 기구였다. 따라서 산헤드린은 사법권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유다인 율법에 따라 형사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행정적인 권위를 가졌고 그 자체의 치안관이 구속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며, 또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사건을 재판할 권한이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다만 사형만은 로마 총독(행정 장관)의 확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총독은 유다인의 일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산헤드린의 요구에 따라 그 판단을 조정했다고 한다. 신약에서 산헤드린이 사형에 관련된 단 한 번의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의 경우였다. 그들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죽이도록 결정한 것이다. 다만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인 것은 성난 군중의 행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산헤드린은 매일 아침 희생물을 드리는 시간부터 저녁 희생물을 드리는 시간까지 열렸고, 안식일이나 명절에는 모임이 없었다. 산헤드린의 의원들은 반원형으로 자리를 만들어 서로를 볼 수 있도록 앉았고 죄수는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했으며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형선고는 재판하는 당일에 할 수 없었으며, 재판관의 선고는 그 다음 날에 했다고 한다. 따라서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은 금요일(다음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이나 명절 전일에 재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편법을 썼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꼭 죽이기 위해서 금요일 새벽부터 재판을 시작하여 그날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또한 시체를 다음 날 안식일까지 두지 않으려고 그날로 예수님의 죽음을 급히 재촉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얼마나 서둘렀는지, 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얼마나 혹독한 심문과 매질이 주어졌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참혹하고 가혹했는지를 알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목을 발견하지 못하고 유다인들에게 넘기려 했지만 산헤드린의 결정과 군중들의 선동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동된 유다인들은 그들의 결정에 따르도록 빌라도에게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오!”(요한 19,15)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결정과 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형에 처하여 죽으셨다. 당시에 노예들이나 중범자들 특히 반역자, 항거자, 배반자들에게만 가했던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오늘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처럼 참혹한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것은 인류 역사에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이신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참회해야 한다.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