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복음: 요한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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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4-21 08:55 조회1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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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요한 20,26).
오늘은 부활절 제2주일이다.
매년 부활 제2주일에는 요한 복음 사가가 전하는 20장 19절부터 31절의 복음을 읽고 묵상한다. 오늘 복음은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전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안식일 다음날,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전해주고 있고, 후반부는 여드레 뒤(안식일 다음 날)에 토마와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일을 전해주고 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이 안식일 다음 날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지내고 있는 일요일이다. 이날을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또는 ‘주님의 날’이라고 부른다. 금년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주님의 날)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자.
‘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로서 하느님의 신성이 넘치는 날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주일’의 기원은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주님의 날’과 관계가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께서 함께하시는 특별한 날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 안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신성을 나타내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신 날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개입하신 날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면서 주님의 날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주님의 날’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을 갖게 되었는데 첫째는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당신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신 승리의 날이었으며, 둘째는 경신례로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날을 가리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께서 원수를 물리쳐주신 승리의 날과 경신례를 드리는 날은 하느님의 신성이 넘치는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로써 주님의 날은 야훼야말로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고유한 믿음을 갖게 하는 거룩한 날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 B.C. 800년부터 B.C. 400년 사이에 예언자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주님의 날을 묘사하였는데 이날을 야훼의 날로 부르면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너희는 통곡하여라. 야훼의 날이 다가온다. 전능하신 이께서 너희를 파멸시키시러 오신다”(이사 13,6)라고 말하였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종말론적 야훼의 날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이었는데 대대적인 멸망의 날이었고, 심판과 선별의 날이었으며, 모든 것을 숙청하고 끝내는 날이었다. 따라서 이후 구약성서에 나오는 ‘주님의 날’이란 대개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 날이 되었다. 그러나 야훼의 날인 주님의 날이 종말론적인 성격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주일’을 종말론적인 주님의 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께서 오심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다시 주어졌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며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면서 거룩한 예배 의식을 드렸다. 이날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주님의 대승리를 경축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주의 만찬인 ‘성찬’을 거행하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종말론적 주님의 날, 즉 재림을 기다렸다.
따라서 주일이란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종말론적 주님의 날을 예표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하느님의 신성이 넘치는 날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주일’로 거룩하게 지낸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적으로 개입하신 위대한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주일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에 택해졌다는 근거는 주님의 부활 사건과 발현하신 복음서들의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들과 함께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에 주일을 지냈음을 사도 행전은 “안식일 다음 날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한자리에 모였다”(사도 20,7a)라고 전하고 있고, 고린토 전서를 보면 “내가 여러분에게 간 다음에야 비로소 헌금하느라고 서두르지 말고 여러분은 일요일마다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 두십시오”(1고린 16,2) 하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당시에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을 도와주기 위해서 여러 교회에 헌금을 부탁하였는데 고린토 신자들에게 매 주일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일요일에 저축하도록 당부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당시 매주 일요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냈음을 볼 수 있다.
‘주일’은 유다인의 안식일과 현저하게 구분된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두 날을 따로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즉 유다인의 안식일도 지냈음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안식일이 되어 그곳 회당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회당에서 율법서와 예언서의 낭독이 끝나자 회당의 간부들이 사람을 시켜 바울로와 바르나바에게 ‘두 분께서 혹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이 회중에게 한 말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사도 13,14-15).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지키는 일이나 초생달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에게도 비난을 사지 마십시오”(골로 2,16)라고 말한 점으로 보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안식일 준수를 반대함으로써 유다계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안식일 준수에 대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 후 그리스도교가 이방인 지역에까지 점점 전파되자 안식일 준수는 이내 사라지게 되고, 안식일 준수 문제로 안식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상 구속하지 않았다. 이방인 그리스도교에서는 2세기에 이미 안식일 준수가 사라졌음을 볼 수 있다. 그후 그리스도교는 안식일 준수를 제한하고 주일만을 지키도록 규정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날인 주일을 어떻게 준수했는가(가해·나해·다해-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참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특유의 예배 의식을 가지고 지냈다는 점이다. 교회는 2세기초의 문헌이 전해준 대로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에 주의 만찬(성찬), 성서, 기도를 포함한 의식 행사로 주님의 역사적 사건인 수난과 부활을 기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야훼의 날인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다.
휴식일로서의 주일에 대한 개념을 보면,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주일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일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3세기에 들어서 엄격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더욱 축하하기 위해 그들의 사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감에 따라 자연히 작업장이나 법정의 문을 닫게 되고 휴식의 날이 되었다. 그 후 교부 암부로시오와 크리소스토모에 와서 모세의 제4계명을 기반으로 하여 주일이 노동하지 않는 날로 강조되는데 이후 중세기에 들어서면서 엄격하게 노동을 제한하였다. 다만 농촌의 노동은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소홀히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되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전반부를 잠시 살펴보자.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께서는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안식일 다음 날,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평화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믿음과 신앙에서 오는 평화(다해-부활 제6주일 참조)였다. 예수님께서는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에서 오는 참평화를 주고자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참 평화를 주고자 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이었다.
복음의 후반부는 토마의 불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전한다.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 없이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24-31).
토마는 누구인가? 토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토마의 성격은 요한 복음서에 조금 나타나고 있다. 요한 복음 11장에 나오는 ‘라자로의 죽음’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유다로 가시기로 결심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하면서 꺼리는데 토마는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 합시다” 하고 강렬한 충성심과 용기를 표시한다. 토마는 적극적이면서 대단한 정열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도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요한 14,5) 하고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고백할 만큼 솔직하고 겸손함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던 확실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토마의 솔직하고 정열적이며 겸손한 믿음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로서 하느님의 신성이 넘치는 날이며 종말론적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주일’은 하느님의 생명과 은총이 넘치는 축복의 날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의무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기념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축복을 받는 거룩한 날로 지내야 한다. 그리고 모두는 ‘주간의 첫째 날’인 주일에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주님 안에서 서로 하나됨을 다짐해야 한다.
“안식일 다음 날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한자리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