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1)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 납치 사건[가톨릭신문 202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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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3-12 조회 113회본문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1)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 납치 사건
발행일 2026-03-15 제 3482호 12면
‘사회 정의’ 외쳤던 사제 납치 만행…민주화 위한 교회 연대 불붙다
“전주교구 문정현 神父 피랍 15시간 - 15시간 불법 강제 피랍에 항의, 단식에 들어갔던 전주교구 장계본당 주임 문정현 신부가 단식 7일째인 21일 당국이 정식 사과함으로써 단식을 풀었다. 이와 함께 20일부터 가톨릭센터에서 집단 단식 농성 중이던 일부 성직자 및 평신도 40명도 ‘사과’를 듣고 해산했다. 5·18민주화운동 5주기를 앞둔 15일 오전 9시30분경 문 신부를 강제 납치, 88고속도로를 거쳐 동해안 고속화도로를 경유, 경북 백암온천 입구까지 연행했다가 16일 새벽 1시경 장계성당에 돌려보낸 기관원들은 문정현 신부의 단식을 필두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항의가 강력해지자 21일 오후 4시경 교구청을 방문, 정평위 비상대책회의와 박정일 주교, 문정현 신부에게 차례로 사과를 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5월 26일자 7면)
1985년 5월, 정권의 불법 강제피랍에 항의하며 전주교구청에서 단식 중인 문정현 신부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정부와 교회의 갈등 재개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와 교황 방한을 전후해, 교회와 정부는 행사 개최를 위해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축제의 분위기가 걷힌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정부와의 갈등은 다시 본격화됐습니다. 그 바탕에는 독재정권의 억압적 통치와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고통을 겪는 민중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민주화 운동 그리고 노동, 빈민, 인권 등 부조리가 만연한 제반 영역에서 참된 복음화와 인간화를 위한 노력에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정부와 교회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이 본격화된 사건이 5.18민주화운동 5주기인 1985년 5월 전주교구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 납치 사건입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5월 26일자 7면은 불법 납치에 대해 항의하며 7일간 단식하던 문 신부가 당국의 사과로 단식을 중단한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지면에는 전국 각 교구의 5주기 추모행사 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문 신부의 납치와 단식 그리고 5주기 추모 소식이 나란히 실린 지면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문 신부는 당시 “이번 납치는 5월 17일 광주 남동성당에서 있었던 광주 의거 추모미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며 “신부라는 특권을 갖고 산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런데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얼마나 곤욕을 당하겠는가”라며 공권력의 폭력과 인권 유린을 비판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촉구
5.18 민주화운동 5주기인 5월 18일을 앞두고 정부는 추모 행사 저지에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광주에서는 전국에서 온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2000여 명이 하루 전날인 17일 저녁 7시30분 남동성당에서 추모미사 및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광주 정평위가 주최한 이날 추모식에서는 지금까지 금기시됐던 광주 항쟁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광주 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당시 서울 구의동본당 주임이자 정평위 중앙위원이었던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는 5월 17일 광주대교구 ‘5.18 광주의거 추모미사 및 추모식’에서 강론을 통해 “언제까지 광주를 묻어둘 수는 없다”며 “속히 진실을 알려 화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추모 행사들을 축소하고 저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비 검속 과정에서 문 신부가 납치됐던 것입니다. 문 신부는 이에 대해 항의, 단식에 들어갔고 20일부터는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 40여 명이 가톨릭센터에서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교회 내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21일 오후 4시경 납치했던 기관에서 전주교구청으로 박정일(미카엘) 주교와 문정현 신부, 그리고 정평위 비상대책위를 차례로 방문, 사과함으로써 모두 단식 농성을 풀었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5월 26일 7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전방위적인 사회 참여
독재정권의 억압적 통치는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의 부조리를 양산했습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가난한 민중들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교회의 사회교리에 바탕을 두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부와 극심한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1984년 7월부터 노동자들의 단결권 보장 등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전국 서명운동에 돌입했습니다. 그 결과 불과 반년 만인 1985년 2월 25일까지 총 12만4941명의 서명을 모아 5월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또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1985년 3월 근로자의 날을 맞아 정부 당국에 노동자들의 최저생계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저임금제 실시’와 정당한 교섭을 위한 ‘노동 3권 보장’을 강력히 촉구하며 노동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인권과 빈민 문제로도 확산됐습니다. 정평위는 1985년 4월 11일 정치범과 양심수들의 조속한 석방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여기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민청학련, 오송회,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과 김대중, 문익환 등 재야 정치인 및 종교인들의 사면과 복권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1985년 하반기에는 서울 목동과 신정동 일대 신시가지 개발 계획으로 대규모 철거민 사태가 발생하자, 목동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목동지역 철거대책 추진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이들은 무허가 철거민들의 생존권 보호를 위해 ‘선입주 후철거’ 및 철거 건물에 대한 현실적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시 당국과 크고 작은 충돌을 감내하며 끝까지 연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가장 열정적으로 수행합니다. 그 여정은 고단하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었고 반독재 저항의 강력한 구심점이었습니다. 독재 권력은 학생 시위를 봉쇄하기 위한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 문정현 신부 불법 납치, 부천서 성고문 사건 은폐 등 폭력으로 대응했지만 이는 오히려 천주교회 전체의 저항과 연대를 촉발하며 국가 권력의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자충수가 됐습니다.
마침내 무소불위의 제5공화국 철권통치는 온 나라를 뒤흔든 1987년 6월 민중 항쟁으로 무너져 내릴 운명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한가운데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이 있었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