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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교구장 성탄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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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6-12-15 09:25 조회3,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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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태양이 온 누리에!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1. 온 나라의 운명이 몇 사람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백만이 모인 광장에, 신문의 제1면에, 국민의 마음속에 요한복음(1장 5절)의 이 말씀이 새삼 크게 떠올랐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는 지난 10월말부터 지금까지 계속, 어둠의 바다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다가 밝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대한민국호의 이 구석 저 구석을 환히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새롭게 느끼며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진리입니다. 

   촛불이 그 어둠을 밝혀주었습니다. “어둠을 한탄하기보다 초 한 자루를 켜 들어라.”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서도, “온 나라,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어둠을 내 손에 든 초 한 자루로 어떻게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밖으로 뛰쳐나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넷, 여덟, 열여섯이 되는 식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만 그 촛불을 전달해도, 마침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온 나라를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처음 광장에서 켜진 2만개의 촛불은 그 다음 20만이 되고, 100만, 95만, 190만을 거쳐서, 여섯 번째 모임에서는 232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한 주간도 안 되어, 그 촛불의 힘에 떠밀린 국회는 더 이상 망설일 겨를도 없이 압도적인 표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일반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자도, 재력가도, 언론도, 그 밖에 어떤 모양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크게 배웠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이사 9,1). 이제 이것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집단지성이 이룬 시민혁명, 돌멩이 하나 던지거나 맞지 않고 이룬 명예혁명이라고들 말합니다. 물질적 발전,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해주면 어떤 행위도 용인된다는 박정희식 모델이 비로소 끝났다고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랫동안 빠져있던 환상에서 벗어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루가 4,4). 그리고 빵으로만 살 수 있다는 듯이, 물질만을 위해서 살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황폐해지는지, 권력과 명예와 겉치장에만 정신을 다 빼앗기면 우리가 얼마나 추악해지는지를 눈으로 보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요즈음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운 것이 언제까지나 내 머리뿐 아니라 정신을 비춰주고, 한 단계 더 내려가 마음을 움직여 ‘정치혁명’에서 ‘의식혁명’으로까지 건너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시작한 행동이 ‘좋은 습관(이것을 ‘덕’이라고 하지요)’을 형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가 꿈꾸는 문명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2. 바로 이 지점에서 걱정도 생깁니다. 촛불이 이루어낸 이 엄청난 변화가, 누군가의 말대로, 세월과 일상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서 꺼져버리지는 않을까? 우리는 과거에도 이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독재를 끝내고 쟁취한 민주화 시대의 사회체제는 대통령 직접 선거를 다시 도입하고,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 전에는 잘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경청하는 희망찬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분야에서 그것은 한 때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촛불과 같이, 그 때 사람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치, 경제, 언론은 서로 얽히고설켜서 나라는 다시 어둠의 바다 속으로 점점 가라앉았고,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어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며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국민은 투표소에서 자기 손으로 도장을 꾹 눌러 뽑아 세운 지도자를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투표소에서 하는 작은 손놀림 하나가 대한민국호를 눌러 어둠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할 수도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답 중의 하나를 우리는 이번 광장의 촛불 집회에서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정치’가 무엇이며 헌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나라의 주인으로서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서양말에서 ‘정치’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평화와 정의로운 분위기에서 정직하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이 정치이며 그것을 보장하는 기본규칙이 헌법입니다. 그러니 정치를 공간적으로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광장’이 되고, 시간적으로 생각하면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를 사는 방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 광장에서 벗어나 밀실로 들어가거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현재에만 갇혀 있으면, 그것은 이미 정치가 아니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강도떼’의 행태로 전락합니다. 국민 모두가 공정하게 나누어야 할 것을 헌법을 거슬러 몇 사람이 가로채고, 자손들이 누려야 할 자연과 자원을 앞당겨 소진시키거나 오염시키면, 미래세대에게서 그것들을 탈취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핵발전소는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의 하나입니다. 

   그리스에서 전해오는 <판도라> 이야기는 사람이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현재에만 갇혀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이)가 인간을 위해 하늘에서 훔쳐다 준 불과 기술은 사람이 정말 앞을 잘 내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쓰면 인간 특유의 문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게 하는 하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뒤에 생각하는 이)는 주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의 매력에 빠져 그와 짝을 맺었고 판도라는 결국 비밀의 상자를 열고 말았으며, 거기에서 온갖 질병과 죽음 등 인간세상의 모든 불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것이 밝음先見之明이라면, 그 반대는 일이 터져버린 다음 뒤를 돌아다보며 느끼는 후회의 어둠 後悔之暗입니다. 불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사용한 나무, 석탄, 석유에 이어 현대에 와서는 원자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핵을 이용하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술의 발전과 응용에 절대 필요한 불-에너지를 얻은 것이 사실이지만, 당장 보기에는 큰 매력을 행사하는 것이 그 안에 얼마나 가공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가 세계 곳곳에서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평화목적이라는 핵발전소 사고 가운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만 해도, 1978년 5월에 상용운전을 시작하여 1986년 4월 26일 폭발한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에 이어,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핵발전소를 점점 줄여나가다가 마침내 완전히 없애기로 정책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오히려 더 많이 짓고 앞으로도 여러 개를 추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단위 면적당 핵발전소가 세계에서도 가장 많고, 거기에 불량부품까지 대량 사용된 사실이 이미 각종 매체를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핵발전소가 폭발하면 당장 대피해야 할 반경 30km 내의 인구가 후쿠시마의 경우 17만 명인데 비해, 고리 핵발전소의 경우는 380만 명으로 후쿠시마보다 22배나 많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 <판도라>가 보여주듯, 우리나라는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옆에 끼고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공직자를 뽑을 때, 누가 과연 당장의 우리 삶뿐 아니라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까지 멀리 내다보며 정책을 만들고 실천할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아보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재벌,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 언론 등 각 분야의 개혁을 주장하고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입법, 사법,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공복’ 답게, 주인을 위해서 참으로 정직하게 일하는지를 늘 지켜보는 감시의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부족하거나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물질, 권력, 명예, 쾌락에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서로 도와주어야만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다른 한 편, 인간의 삶은 ‘광장’으로 상징되고, ‘공동체’, ‘더불어’ 등으로 표현되는 사회생활과, 좋은 의미의 ‘밀실’로 상징되고, ‘단독자’, ‘홀로’ 등으로 표현되는 사생활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사회생활이 빠지면 악마 쪽으로 기울게 되고, 사생활이 없으면 동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은 흔히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참된 밀실인 양심 속으로 들어가 그  소리를 더 잘 듣고, 인간 특유의 감각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 너머를 바라보고, 육체적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며, 물질을 기쁘게 이용하면서도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칸트가 한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생각할수록 나를 깊은 신비감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별이 둘 있다. 하나는 저 위에서 반짝거리는 별, 또 하나는 내 안에서 팔딱거리는 양심이라는 이름의 별이다.” 우리는 이 두 별을 다 만드시고, 어떤 어둠도 물리치시는 “승리의 태양”(말라 3,20)을 믿기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만의 힘으로 세상에 정의를 세울 수 없습니다. 깊은 구덩이 속에 빠진 사람이 자기의 두 귀를 잡고 끌어올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변화, 참된 혁명은 각 사람이 자기의 참된 밀실, 양심 속에 들어가서 홀로 절대자를 만남으로써 시작됩니다. 스승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 위대한 사도가 된 베드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 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2베드 1,19). 하느님 말씀이 적힌 종이가 뚫어질 정도로 눈빛을 거기 고정시키고(眼光紙背徹안광지배철) 묵상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정의를 세울 힘은 주님께만 있다”(이사 45,24)는 사실을 깨닫고,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알아, 마침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정의의 빛”(지혜 5,6)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되고,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게”(필립 2,15) 될 것입니다. 그 빛의 근원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정의의 빛”(지혜 5,6)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되고,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게”(필립 2,15) 될 것입니다. 그 빛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