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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소개]볼프강 모짜르트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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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3-10-25 00:00 조회1,6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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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전쟁선포

1.음악의 천재 볼프강 모짜르트 아마데우스와 동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당대의 최고의 음악가로서 그 탁월함을 인정받고 본인 스스로도 만족하며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을 음악가 샬리에리와 그 시대에는 자신의 작품마저도 인정받지 못하고 비운의 삶을 마친 천재 음악가 모짜르트의 아이러니한 생애를 그린 영화 “볼프강 모짜르트 아마데우스”는 1986년 아카데미상 8개부문을 휩쓸면서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2.샬리에르란 사람, 그는 어렷을적부터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지극히 순수하고도 감동적인 소망을 갖고 자랐으며, 과연 그의 꿈에 못지 않는 노력을 통해서 당시 음악가로서 성공을 말해주는 궁정악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더 이상 그를 능가할 작곡가도 없고, 그만큼 성공한 작곡가도 없을 즈음에 어느날 갑자기 신의 창조물로 대변되는 젊은 “모짜르트”가 혜성처럼 나타나 그 앞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극적으로 반전되어 “노력”은 어차피 “인간의 행위차원”일뿐이지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을 입은 창조물 앞에서는 게임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모짜르트의 비범함은 도저히 '노력'이라는 행위로는 극복될 수 없는 –변경이 불가능한- 정도의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그리고 그 후 여러번의 경험을 통해 그 스스로도 경탄하면서 알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는 샬리에리가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확인하는 장면을 아주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확인시켜주면서 평범(=인간의 영역)과 비범(=신의 영역)을 인간과 신의 차이처럼 그 깊이와 거리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모짜르트와 샬리에르가 대면할 당시에 이미 샬리에리는 이미 그 '비범'을 인정받아 궁정음악가로서 최고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모짜르트는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젊은 작곡가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도 샬리에리는 이 모짜르트를 처음으로 만나자마자 모짜르트의 비범함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모짜르트의 악보를 몰래 훔쳐보면서 거의 경악에 가까운 환희에 떠는 샬리에리의 표정을 보면서 차라리 고통스럽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경탄장면은 여러번 더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샬리에르의 두가지 엇갈린 표정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이게 원본이라고요?”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경탄과 “하느님, 왜 저에게는 열정만 주셨지 재능은 주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는 절망섞인 분노의 표정입니다. 결국 샬리에르는 그 분노의 표정으로 그의 방에 걸려있던 십자가를 불에 던지며 “신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당신의 창조물을 파괴하겠다”라고 눈을 부릅뜬 그의 표정에서 이미 모짜르트란 인물과의 질투심을 넘어서서 하느님과의 전투태세에 들어선 한 인간의 절망 섞인 분노를 보게 됩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의 운명을 분명히 다르게 갑니다. 모짜르트는 아무리 그가 작곡을 해도 그의 음악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샬리에르 뿐, 그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한 인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에 샬리에르는 신의 영광이 아닌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고 끌려하는 음악을 만들어서 그의 인기는 고조에 달하고, 마침내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란 칭호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모짜르트와 함께 살던 그 당시에 그런 칭호를 받았던 샬리에리는 행복했을까? 그럴때마다 그는 신을 향한 묘한 웃음을 지어보기도 하지만, 그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더 절망적인 슬픔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평범(=인간)과 비범(=신)의 싸움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데, 이 또한 매우 절묘하게 드러냅니다. 살리에리는 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모짜르트를 죽게 하는데 일조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까지 모짜르트의 옆에서 모짜르트의 마지막 걸작, 레퀴엠의 완성을 돕는데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 그의 양면성을 보며 우리는 묻게 됩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가 바라던 대로 모짜르트의 파멸시키면서도 통쾌해 하거나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또한 그의 임종을 지키며 그의 마지막 걸작을 완성키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기도 하고. 모짜르트의 장례식에서는 우울하고도 씁슬한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이는 그가 훗날에 사제에게 고백하는 부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그는 신에게 이기려고 했지만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가 파멸시키려고 한 인간이 마지막까지 걸작을 거의 쏟아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어느새 신에 대한 분노에 빠진 '평범'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보인 천재성 앞에서 경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수한 '평범'으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결국 신의 의지와 신의 역사는 노력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가슴쓰라린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신에 대한 분노가 되어지는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끼기 이전에 신이 하는 일은 놀놀라울 수 밖에 없고 그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경탄할 수 밖에는 별도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그야말로 모짜르트라는 인간은 그의 노력으로 파멸시킬 수는 있었으나,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천재성을 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아마데우스의 마지막은 본인의 힘으로 해보겠다고 끝까지 하느님과의 전투에 임했던 한 인간이 그 전투에 끝에서 슾프게 무릎꾾으며 막을 내립니다.

3.복음성서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하느님과의 전쟁을 선포한 간큰 어른들”입니다. 애정과 자비가 없는 법을 만들어 그들만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교묘하게 내세우면서, 그들만이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히 인정받아야 하고, 뭇백성 중에 “비범한 사람”이란 인물로 인정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복수를 꿈꿨던 그들, 그보다도 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힘과 노력만으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들,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엄청난 오만이요, 전쟁을 선포한 이들입니다. 그 시대에 의인들로 자처했던 그들, 그러기에 그들은 “너희들과는 다른 비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바리사이이”니, 율법학자니 하면서 백성들 앞에 끊임없이 ‘비범한 자”로 남고 싶어하며 특권의식에 빠졌던 그들, 그렇지 않으면 용납이 안되던 그들의 처신과 분노,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들이 평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달아야 했고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 그들의 노력은 너무도 작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슬픈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일 수 있었지만, 하느님 은총으부터 오는 힘은 거역할 수 없었던 그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 어쩌면 그들의 모습 안에서 샬리에리의 어두운 모습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하루도 이 부족하고 가난한 삶에 하루를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격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