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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요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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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3-25 08:52 조회154회 댓글0건

본문

우리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골로 3,1-2).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의로서 그리스도교 설립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희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이기도 하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1고린 15,14-15).

종교학적으로 볼 때 부활은 인간의 생사 문제, 영원과 시간,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갈망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은 죽음의 문제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죽음과 영원한 생명은 하나의 인생에 대한 물음이며, 그리스도교의 부활관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인생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인간의 숙제인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물음을 풀어주는 것이며,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인가? 어렵긴 하지만,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맞이하여 부활에 대한 개념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신앙에 적극적인 부활에 대한 사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구약성서의 후기에 나타나는데, 기원전 2-3세기경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죽음 저편에서의 삶을 모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에 널리 유포된 저승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죽은 자가 다시 생명을 취한다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훼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시어 그들과 항상 함께하시고 죽음도, 삶도 야훼 하느님의 것이며, 야훼 하느님께서 이 모두를 지배하신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후대에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불사불멸에 대한 욕구에서가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신앙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한 사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부활에 대한 성서상의 개념은 불사에 대한 그리스적(헬레니즘) 개념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리스적 개념에 따르면 사람의 영혼은 그 본성이 썩지 않는 것이어서 사람의 영혼은 죽음으로써 육체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그 순간부터 신적 불사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다. 즉 그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구분하여 육체는 썩어 없어지고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영혼만이 불멸의 세계인 신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자연종교에 있어서도 인간의 부활은 찾아볼 수 없고 그들의 신만이 다시 살아났다는 신화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신화 오시리스(Osiris),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Tammouz), 가나안의 신화 바알(Baal), 그리스 신화 아도니스(Adonis) 등이 그러한 유의 신화들이다. 따라서 고대 근동의 종교사상을 보면 신적 존재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근거는 제공하고 있으나, 인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없었다. 그리스, 로마의 종교 사상에서도 영혼 불멸에 관한 신앙은 있으나 육체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없었다. 그리고 헬레니즘의 신비 종교, 이를테면 이식스 여신 숭배 등에도 영혼의 상징적 부활이나 재생에 관한 신앙은 나타나지만 죽은 후 육체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의 계시는 처음부터 이러한 신화와 이에 수반되는 종교의식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나타난다. 성서에 있어서 부활은 육체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며, 육체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 부활 개념은 육체는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성서는 이러한 부활에 대한 사상을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시로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설화에 보면 하느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진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영혼(하느님의 숨)을 주시어 숨을 쉬게 하셨다. 창세기는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7).

육체가 숨을 쉬었다는 것은 곧 인간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며,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영적 입김(숨)'이 있으며 숨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이 육체에 영혼(하느님의 숨)을 주심으로써 인간이 숨을 쉬면서 생명을 얻게 된다. 따라서 성서상에 영혼(하느님의 숨)은 생명의 표시이지만 생명 그 자체는 아니다. 생명 그 자체는 육체가 숨을 쉬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만일 육체에 숨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하느님의 숨)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육체에 불어넣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인간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이며 이는 '영혼과 육신의 부활'로 표현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부활은 육체와 영혼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며, 전인(육체와 영혼)의 부활로 알아들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2세기에 그리스와 로마에서 두드러지게 성행했던 철학적, 종교적 운동이었던 영지주의(Gnosticism; 그노시스)에 대항하여 부활의 개념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즉 육신과 영혼을 구분하여 육신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이 부활한다는 영지주의를 단호하게 부인하고 배척하였다.

영혼이 명부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혼이 그곳에서 육체 없이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혼은 육체 없이는 자기를 실현할 수 없으므로 그 '삶으로서'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육체와 더불어 영혼이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성서는 인간에 대해서 지금 육체가 숨을 쉬면서 하느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현재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서적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 자체가 현 상태로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벗어나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라면 결국 인간의 영혼은 명부의 포로가 될 것이고 지금의 육체는 무덤에서 썩어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죽음의 세계에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에로 불러들이신다. 즉 육신과 함께 다시 살리실 것이다. 설령 인간이 죽음의 세계인 이 세상에 살다가 그대로 명부(스올)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은총으로 당신의 생명에로 불러들이신다.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사야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의 백성이 다시 살 것입니다. 그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고 땅 속에 누워 있는 자들이 깨어나 기뻐 뛸 것입니다. 땅은 반짝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죽은 넋들을 다시 솟아 나게 할 것입니다"(이사 26,19).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죽은 자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명부(스올)에서 끌어올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얻게 될 새 생명은 현세에서의 생명(영혼과 육체)과 같은 것이 아니라 변모된 생명이다(다니 12,3). 바오로 사도는 변모된 생명인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 뿐입니다"(1고린 15,35-37).

씨가 땅에 묻혀 썩지만 그 씨가 죽은 것은 아니다. 그 씨는 비록 땅에 묻혀 썩을지라도 새로운 싹으로 다시 살아난다. 본래의 씨앗 모양이 아니라 새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부활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설명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육체가 곧 구원의 장소임을 말하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4)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1고린 15,51-52)라고 말하고 있다. 변화되는 모습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태 2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부활의 신비가 하느님께로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받고 있는 당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이 권능을 회당장 야이로의 딸(마르 5,21-43)과 나인이라는 동네의 과부의 아들(루가 7,11-17), 그리고 당신의 친구 라자로(요한 11장) 등과 같은 여러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나타내셨다. 예언자들의 기적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부활의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비록 그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암시적으로 예고하시기 위해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에 앞서 이상과 같은 기적뿐 아니라 명백한 말씀으로 예언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하셨으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는 성전의 증표로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셨다. 그러나 죽은 자들 중에서 부활하리라는 예언을 열두 사도들마저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부활 사건이 몸소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부활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가 되었으며 핵심 교리가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제 점점 그 사실들이 사건과 체험을 통해서 증명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오늘 복음은 빈 무덤 사건에 관한 것이다. 매년 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오늘,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빈 무덤 사건을 들려준다. 이는 빈 무덤 사건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명하는 제일 사건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처음부터 육체적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빈 무덤 사건은 최초의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어떤 부활을 보았으며, 어떠한 형태의 부활을 선포했는지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덤에 묻히신 분이 다시 살아나신 육신의 부활이다. 우리도 언젠가 주님처럼 육신(변화된 육신)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다. 무덤에 묻히신 분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오늘은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이 넘치는 날이며 거룩한 날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넘치기를 빌어 본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