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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국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시복시성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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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2-10 00:00 조회4,551회 댓글0건

본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시복시성을 앞두고

 

1. 시복시성(諡福諡聖)

복자로 추대하는 것을 시복,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을 시성이라고 한다. 가톨릭에서는 성덕(聖德)이 높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하느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덕행에 대한 찬사가 많고 그로 인하여 기적이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지방의 주교(主敎)가 그에 관한 언행 ·저서 ·기적 등을 엄밀히 조사한 자료를 로마 교황청에 보고한다. 교황청에서는 보고 사실을 엄밀히 검토 조사한 뒤 추천할 만하다고 인정되면 교황에게 보고한다. 이어 교황이 시복조사 허가를 내리면 관계부처인 시성시복 성성(聖省)은 본격적으로 조사하게 되는데, 그 결과를 교황에게 보고하면 교황은 그의 성덕을 인정하는 교서를 발표한다. 시복식을 통해 복자로 선포하는 의식이 끝나면 복자로 불리게 된다. 그 후에도 그 사람을 통하여 확실한 기적이 두 가지 이상 있을 경우 교황이 의식을 갖고 그 사람을 성인(聖人)으로 존숭하게 되는데 이 의식을 시성식이라고 한다.

[출처 : 두산백과]

 

2.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시복시성의 의미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시복시성을 위해 관련 현장을 방문, 조사 작업을 펼쳐왔었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법정이 지난 2009년 5월 20일 폐정돼 모든 서류가 교황청 시성성에 전해지고 시복시성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온 결과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다.

 

▲ 왜 124위인가?

이미 여러 차례 밝혀진 것처럼 124위는 103위 순교자 이전 순교자들 즉, 신해(1791)와 신유박해(1801) 순교자들이다. 1984년 시성된 103위는 모두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박해 때 숨진 순교자들로, 이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격이다.

124위가 103위보다 먼저 순교한 신앙선조들이라는 이유 외에도 124위가 갖는 시복시성의 당위성은 무엇이 있을까. 교회사 관계자들은 한국 교회 창립의 주춧돌을 놓은 신앙 선조들을 되살려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에 맞갖게 응전하는 교회를 만들고 신앙공동체의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전한다.

결과적으로 이번 124위 시복시성은 신앙 후손인 우리 자신, 즉 한국 교회를 위한 것임을 재확인하고 신앙을 다지기 위함인 것이다.

▲ 124위가 던지는 메시지

124위 순교자들은 초기교회 신자들로서 한국 교회의 ‘주추’를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시성된 103위 성인들은 그 주추 위에 신앙이라는 ‘기둥’을 세운 셈이다.

그만큼 124위가 갖는 의미의 무게는 무겁다. 한국 교회의 첫걸음을 뗀 신앙선조들은 우리 신앙의 ‘초심’이다. 신앙의 늘 새로움이며 새로운 도전일 수밖에 없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대의 십자가’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신앙의 길을 걷는 신앙선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124위가 주문모 신부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 평신도들로 이뤄진 것도 의미가 크다.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잃지 않은 평신도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7일, 오혜민 기자]

 

3. 전주교구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24위

전주교구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은 24위로 서울대교구 지역을 제외한 가장 많은 수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특히 이 지역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124위를 대표하는 윤지충(바오로)이 순교한 곳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며 김제에서 1명, 무장에서 1명이 순교했다.

 

▧ 윤지충과 가족들

▲윤지충(바오로)은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첫 번째로 참수된 순교자(1791년 12월 8일 순교)다.

그는 1759년 전라도 진산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83년 봄 진사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이 무렵 고종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눈뜨게 됐으며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후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이후 윤지충은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프란치스코),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쳤으며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도 왕래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그는 권상연과 함께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에 대한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져 소란스럽게 해 얼마 후,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군수에게 내려졌다. 그들은 피신했지만 진산군수가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곧바로 자수했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했다.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혹독한 형벌을 받아냈다. 당시 전라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당시 그들의 굳은 믿음을 보여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했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32세의 나이로, 권상연은 40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그들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시신이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선명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또 ‘구베아 주교가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1979년 8월 15일자 편지’를 보면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이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냈고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유항검의 가족들

윤지충의 인척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해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됐다.

유항검의 신앙답게 그의 가족 또한 대부분 전주교구 지역 하느님의 종에 포함됐다. 1801년 순교한 하느님의 종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다음 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조카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였으므로 유항검의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대상이었다.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유항검은 이후 교회의 가르침을 이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으로 파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했으며, 1790년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아 체포됐다가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기도 했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하도록 요청하려는 주 신부의 계획을 앞장서서 돕는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가장 먼저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어떠한 잔인한 형벌에도 입을 열지 않았으며 결국 모반죄로 전주로 옮겨져 처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출처 : 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6)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전주교구 ① 2009-11-29 제2674호, 11면 오혜민 기자]

 

4. 전주교구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24위 명단

 

성명

세례명

연도

출생지

순교형식

순교지

순교일

1

윤지충

바오로

1759

전라도 진산

참수

전라도 전주

1791.12.8

2

권상연

야고보

1751

전라도 진산

참수

전라도 전주

1791.12.8

3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1756

전라도 김제

참수

전라도 김제

1801.8.26

4

김천애

안드레아

1760

전라도 전주

참수

전라도 전주

1801.8.27 (혹은 28)

5

최여겸

마티아

1763

전라도 무장

참수

전라도 무장

1801.8.27

6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

전라도 전주

능지처참

전라도 전주

1801.10.24

7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

전라도 진산

능지처참

전라도 전주

1801.10.24

8

유중철

요한

1779

전라도 전주

교수

전라도 전주

1801.11.14

9

유문석

요한

1784

전라도 전주

교수

전라도 전주

1801.11.14

10

이순이

누갈다

1782

한양

참수

전라도 전주

1802.1.31

11

유중성

마태오

 

전라도 전주

참수

전라도 전주

1802.1.31

12

이경언

바오로

1792

한양

옥사

전라도 전주

1827.6.27

13

이일언

1767

충청도 홍주

참수

전라도 전주

1839.5.29

14

신태보

베드로

1769

경기도

참수

전라도 전주

1839.5.29

15

이태권

베드로

1782

충청도 홍주

참수

전라도 전주

1839.5.29

16

정태봉

바오로

1796

충청도 덕산

참수

전라도 전주

1839.5.29

17

김대권

베드로

 

충청도 청양

참수

전라도 전주

1839.5.29

18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

충청도 덕산

옥사

전라도 전주

1839.

10월 경

19

심조이

바르바라

1813

경기도 인천

옥사

전라도 전주

1839.11.11

20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827

 

교수

전라도 전주

1839.12.5

(혹은 12월6일)

21

홍재영

프로타시오

1780

충청도 예산

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