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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81호(여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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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06-01 15:36 조회3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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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리스도교는  행동하는  종교다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

공자(기원전 551-479)는 영향력이 큰 사상가로서 노자(기원전 6세기)와는 적수였다. 공자는 철학자와 교육자 그리고 도덕의 수호자였다. 간혹 그는 이렇게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 묘사에는 묘하게도 유머와 평온함과 단순함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

과연 공자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었던가? 그가 어떤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했다면, 그렇게 행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공자 자신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곧 지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많은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순수한 지식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많은 일을 토론하지 않고도 단순히 행하고,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유머와 평온함 그리고 단순함이 결합된 이러한 행동은, 많은 일이 단순히 행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작가 슈테판 안드레스Stefan Andres(1906-1970)가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호소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 사람은 저마다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말하는 예언자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행동하는 사람 곧 실행자가 필요합니다.” 작가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자기 소설의 서두에 묘사한다. 그는 그러한 인물로 성 요셉을 제시한다. “성 요셉, 이분은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대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성 요셉은 유명하게 되었어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곧 천사가 그에게 ‘이것을 이행하라.’ 하고 말하고, 천사가 또 그에게 ‘저것을 이행하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명령받은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중대한 일이 맡겨졌는데도 말입니다.”(『Liebesschaukel』, S. 34)

요셉은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행동하는 신앙인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참된 지식의 빛에 다다랐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행동하지 않으면 선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선善은 실천되어야 하고, 그러할 경우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선의 실천은 예수님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는 말씀대로,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주 작은 행동일지라도, 그것은 위대한 결심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2-25) 이러한 몇 구절로 야고보서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의 경청은 행동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경청은 실천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천을 통하여 우리는 예상과는 달리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실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체험하기도 한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자기 인식에 관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깊이 알 수 있습니까? 관찰을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행동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대의 의무를 행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그대 자신에 대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일상의 요구입니다.”(『Wilhelm Meisters Wanderjahre』, S. 253)

 

그리스도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하여 선포된다.

네덜란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1813-1855)는 그리스도교가 본질상 ‘행동하는 그리스도교’라고 확신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선포된다. 그리스도교는 대단한 말과 설교를 통해 도취시키기 위해 청중들을 모으지 않는다. 물론 말씀을 통한 선포에 비하면, 행동을 통한 선포는 재미없고 번거로운 측면이 많다.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1875-1965)는 말씀을 들은 후, 여기에 행동이 뒤따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저는 말 없이 행동하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는 수년 동안 말씀에 전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저는 큰 기쁨과 함께 신학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새로운 행동이 사랑의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상상했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실행 자체로만 상상했었습니다.” 따라서 슈바이처는 사도 요한의 다음 말씀을 이행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슈바이처는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더욱 중요시했던 것이다.

‘행동’이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여기에서 행동이 사심 없는 말씀의 권능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특히 ‘한처음에 행동이 있었다.’하고 요한복음이 시작하지 않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성경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시작한다. 실제로 타오르는 말씀은 위대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한다.

이른바 ‘선의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던 피에르 신부Abbé Pierre(1912-2007)를 생각해 보자. 그는 1954년 2월 룩셈부르크의 라디오 방송에 출현하여 집 없는 파리 시민들을 돕자고 호소했다. 노숙자들을 돕자는 그의 호소는 이러했다. 

“친구들이여,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떤 여자는 오늘 새벽 3시에 담벼락에서 얼어 죽었습니다. 매일 밤 이천 명이 넘는 노숙자들이 추위에서 빵 없이, 집 없이 떨고 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전체가 그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 그의 엠마우스 공동체에 상상할 수 없는 거액과 이불과 옷들, 양식 등의 선물이 쏟아졌다. 오늘날 그의 공동체는 44개 국가에 진출하여, 400여 개가 구성되어 있다.

 

침묵은 행동을 일으키는 힘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전에 큰소리로 선포했던 바를 대개 실천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경험을 미루어 보면, 침묵은 행동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동하기를 두려워하며 주춤거린다. 불안에 떠는 사람은 대개 말을 많이 하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침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어린 시절에는, 곧 자신의 근원에 더 가까이 있던 어린 시절에 경청과 행동이 따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행해진다. 사무엘의 소명 이야기(1사무 3,1-21)를 묵상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무엘은 말씀을 듣고 즉시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귀가 점점 정화된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그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지혜가 언급하는 마시는 일과 유사하다. “물맛은 마실 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과 행동은 서로 완전히 잘 어울린다. 침묵은 행동을 유발하는 힘의 척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에 대해 구체적인 실례를 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 완전히 자기 마음에 드는 - 접시 열 개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주는 사람은, 이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주변에서 그 사람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곧 가난한 사람들은 접시 열 개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도,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접시 천 개를 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Der Einzelne und sein Gott』, S.131) 이처럼 실천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반면,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온갖 말을 지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다음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천하는 데 인색합니다.… 우리에게는 혀가 아니라 손이 필요합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무 많이 지껄였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지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심 없이 침묵하는 말씀은 실천되기를 바란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심 없이 침묵하는 말씀만이 도움을 베푸는 행동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