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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국일제강점기 천주교인들의 독립운동 내역 -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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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2-21 10:02 조회7,2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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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용정촌 3.13 만세운동
1906년 용정시에 천주교 교우들을 주축으로 조성된 용정촌에서는, 1919313일 정오에 울린 성당 종소리를 신호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시내에 모여 독립축하회라는 이름의 시위를 벌였다. 김영학 회장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을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섰으나 중국 경찰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한다. 교우촌인 대교동의 교향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316일에는 장백현의 천주교 신자 30여 명이 압록강 대안에 있는 혜산의 일본 경찰서를 습격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천주교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단호히 금지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매우 어려웠다. 19191015,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 명의로 통유1호에 천주교 동포여라는 포고문이 게재된다. “여러분은 대한민족이 아니뇨. ... 전 한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고 자유를 부르짖을 때에 어찌하여 삼십만 명 천주교 동포의 소리가 없나뇨. ... 여러분아 종교를 보아 주교는 여러분의 두목이라 하더라도 민족으로 보아 여러분은 저 일인의 학살을 당하는 남녀의 형제자매가 아니뇨. 천주교의 동포가 언제까지든지 가만히 있다 하면 이천만 대한민족은 여러분을 일인보다 더 가증한 적으로 알 것이라.”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38&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6&levelId=ij_027_0010_00020_0030
한편 임시정부는 천주교의 국제성에 주목하여 대한민국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천주교계의 힘을 빌리려 하였다. 1919613일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은 당시 교황청 국무성 장관 가스파리 추기경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또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는 빌렘 신부의 도움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베네딕토 15세 교황(1914-1922 재위)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제작한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읽고 위로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라마교 황궁 대주재(大主宰)로 교황께서 한국교회의 총애하는 자녀들의 받는 핍박에 대하여 어우려(御憂慮)하시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하기를 상제(上帝)께 기구(祈求)하신다는 지()의 서한을 주파리위원부로 승접(承接)하다.”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3구주의 우리 사업’, 1919) 원본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1&itemId=kd&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kd_002_0030_0020_0040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 치릴로와 안공근 요한은 천주교와의 연계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안정근은 19205월 임시정부 특파위원으로 북간도에 파견되었고 대한적십자사 부회장을 맡았다. 안공근은 19214월 임시정부 외무차장으로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천주교 대표로 국민대표대회에 참석한 곽연성 요셉은 한국노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25년 길림 독립운동단체 임원을 맡았다. 만주 독립운동단체에 직접 관여한 안학만 신부처럼 성직자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도 있었다.
국내에서 임시정부에 협력한 성직자와 신자들도 있었다. 윤예원 토마스 신부는 1919년말 신자의 권유로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과 관련한 적십자운동에 관여하다가 뮈텔 주교의 제재로 중단하기도 했다. 일부 신자들은 프랑스인 주교에게 접근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려 시도하였다. 황해도 장연본당 장규섭 등은 19207월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의용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사리원본당 한도영, 안악본당 최익형 등은 군자금 모집 건으로 체포되었다.

 

간도 천주교인들의 무장투쟁단체 대한의민단
간도 지역에서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천주교회도 교육활동이 활발했고 무장투쟁 단체들이 종교를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한반도와 달리 천주교 신자들도 간도에서 무장투쟁단체를 조직했는데, 널리 알려진 것이 대한의민단이다. 방우룡이 대표를 맡아 1920323일 연길현 다조구에서 창설되었다.
방우룡은 1914년 연길에서 천주교 학교를 운영하였고, 1919년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조직 재간도대한민회의사원으로 활동했다. 방우룡을 위시한 간도 천주교 신자들은 3.1운동 이후 재간도대한민회 산하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교민사회의 분위기에 힘입어 조직된 대한의민단은 헌금으로 재정을 충당했으며, 최대 200명의 군인이 참여하였다.
의민단은 19207월 북간도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동도독군부를 창설할 때 대한독립군과 함께 제2대대(대대장 방우룡)로 편성되었고, 소명월구에 있던 방우룡의 집과 천주교회 건물을 군사령부로 썼다. 아울러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해 대한국민회, 대한독립군과 연합해 사관양성소를 세웠으나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 기병들의 공격을 받고 19209월 폐교되었다.
19209월 의민단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 등과 함께 북로사령부를 결성했는데, 이 부대 산하에는 홍범도, 김좌진 등이 연대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 의민단은 192010월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의민단은 일제에 쫓겨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과 행동을 같이하다 19206자유시 참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20년 일제는 이른바 경신참변’(간도대학살)을 일으켜 한국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1941년 제주도에서 골롬반 선교사들과 신자들 체포
194112월 제주도에서 선교하던 아일랜드 출신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제 3명 및 제주본당, 서귀포본당 한국인 신자 32명이 체포되고, 선교사 전원과 신자 9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도슨(), 스위니(), 라이언() 신부는 유언비어 유포, 천황 모독, 전쟁 비협조 등의 죄목을, 하성구, 이응범 등 신자들은 선교사들에게 군사상 비밀을 누설하여 적국을 이롭게 하고 천황을 모독하였으며 내선일체를 부인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42년 광주지방법원 선고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1938-41년 사이 제주성당(현 중앙성당) 또는 자신들의 집에서 일본군의 배치상황 등을 이야기하거나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실형을 선고받았다. 신부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신자들 역시 징역 2년에서 금고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가운데 강붕해·김중현·이응범·하성구·허봉학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강군평·김남식·변태우·윤기옥에게는 건국포장이 1993년 수여됐다. 선교사제 3명은 1999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손 신부는 애국장을, 서 신부와 나 신부는 애족장을 받았다.

 

자료제공: 주교회의 미디어부(가톨릭대사전, 국사편찬위원회 디지털DB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