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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2) 1911년 9월 11~30일[가톨릭신문 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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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1-07-07 조회 2,20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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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2) 1911년 9월 11~30일[가톨릭신문 2010-01-10]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2) 1911년 9월 11~30일
첫 사목 방문 … 수많은 신자들 환영 이어져

1911년 9월 11~12일

내가 대구대목구장으로 부임한 후 첫 사목 방문을 시작한 날이다.

나는 복사와 함께 많은 이들의 전송을 받으며 급행열차를 탔다. 대전에서 내려 일단 밤을 보내기 위해 가까운 일본인 호텔로 갔다. 그런데, 태풍이 시작됐다.

날이 밝자 오후 12시50분 열차 편으로 대전을 떠나 오후 2시10분이 되어서야 연산에 도착했다. 기차선로가 거기까지밖에 놓여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천을 힘들게 건넌 후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말을 타고 40리 길을 가야만 했다. 교우들이 횃불을 들고 되재(전주교구 고산본당의 전신, 1944년 폐쇄됐다)에서 10리(3.93km)나 떨어진 곳까지 마중을 나왔다.

9월 13~20일

아침에 장엄미사를 드렸는데 얼추 보아도 400여 명쯤 되는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러 왔다. 오후에는 강론을 했고 견진성사 받을 사람들을 위해 시험을 보았다.

16일이 되어서는 되재를 떠나 나바위(1845년 10월 12일 성 김대건 신부가 귀국하면서 첫발을 내디딘 곳으로 1897년 본당이 설립된 후 현 전주교구 화산동본당)로 갔다. 내가 되재에 있는 동안 그치지 않았던 비도 다행히 멎었다. 여기서도 교우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나는 예수성심을 주보로 나바위 성당을 강복하고 이어서 종을 강복했다. 영성체자가 많았다.

20일, 나는 다시 나바위에서 안대동(전북 용안군에 있던 본당. 1885년 조스 신부에 의해 설립됐고 당시 이상화 신부가 재임하고 있었다. 현 전주교구 함열본당)으로 떠났다.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들을 만나 견진성사를 주었는데 모두 59명이었다. 아주 바쁜 하루였다.

9월 22~30일

여산읍을 거쳐 전주로 향했다. 자그마치 80리(31.42km)다. 마지막 35리(13.75km)를 가는 동안 보두네 신부의 훌륭한 성당(전주교구 전동성당. 6년이란 기간을 거쳐 1914년 완성)이 내내 보였다. 불행히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페네(Peynet) 신부가 전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30일, 나는 수류(배재본당의 후신으로 전북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에 설립된 본당. 1907년 본당 건물이 세워졌으나 6·25때 화재로 불타고 1959년 현재의 건물이 들어섰다)로 떠났다.

깃발과 보병 나팔을 든 학생들이 20리(7.86km)까지 우리를 마중 나왔다. 미알롱(Mialon) 신부와 페네 신부를 만났다.

■ 드망즈 플로리앙 주교는…

교구 기반시설 마련에 앞장

1906년 10월 19일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드망즈 신부는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취임해 개화기의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경향신문은 창간된 지 4년 만에 폐간되고 만다.

신문에 연재됐던 ‘법률문답’은 독자들에게 많은 지식과 도움을 제공해 높은 찬사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편집 책임을 맡았던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도 그만큼 커질 수 있었다.

그는 또 경향신문의 부록으로 ‘보감’을 간행했는데, 천주교 교리와 교회사에 대한 지식, 교회법 해설은 물론 신자들에게 필요한 일반 상식 등이 자세히 설명돼 있어 바른 신앙과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로 개칭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부 지역이 분할돼 새로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자, 뛰어난 학덕을 인정받던 드망즈 신부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초대 대구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6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6월 26일 대구에 부임했지만, 당시 대구는 교구로서 갖춰야할 시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1912년 한국교회 최초 교구 성직자들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대구교구 지도서’를 편집하고 반포했으며 이듬해에는 주교관 건물과 교구 관리소, 성 유스티노 신학교와 명도회관, 성 바오로 수녀원 등 주요 시설을 차례로 건립했다. 또 1918년 주교좌성당의 확장 공사, 신학교의 나머지 공사를 완공시키며 갖춰야할 모든 조직을 정비했다.

[사진설명]
- 첫 사목방문을 떠나는 드망즈 주교. 기차길이 마련되지 않은 길은 말을 타고 이동했다
- 전주교구 나바위성당의 1911년 당시 내부 모습

정리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