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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나바위본당[가톨릭신문 201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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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6-02-17 조회 2,3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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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나바위본당교육·신앙 구심점으로 자리 지켜온 신앙터

교회건축 토착화의 모범으로 손꼽혀
전북지역 ‘아름다운 순례길’에도 포함
발행일 : 2012-01-15 [제2779호, 14면]
1785년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사목활동을 펼쳤던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다. 목자 잃은 양떼들은 다시금 성사생활에 목마른 상태로 머물러야 했다. 33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프랑스인 신부 3명이 입국에 성공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신자들은 또다시 목자 없는 암흑의 시간과 마주한다. 이러한 때 김대건 신부의 입국소식은 전 교우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겨줬다. 게다가 첫 한국인 사제에 대한 기대는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었다.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는 그리고 그리던 신자들이 있는 고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폭풍으로 표류하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해낸 대장정이었다. 중국 상하이를 출발해 제주도 등을 거쳐 42일 만에 서해안에 도착한 배는 황산포 나바위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나바위본당 초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장약슬·파리외방전교회)와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한국에 들어온 것을 기념해 나바위 인근에 성당을 짓고 1907년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 나바위성당은 개화기 한옥 성당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나바위본당의 선교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나바위 성당·성지는 전북 ‘아름다운 순례길’에도 포함돼 있으며, 열차를 이용해서도 보다 쉽게 순례할 수 있다.

전북 익산시에 속한 나바위와 인근 강경에는 박해를 피해 이주한 교우들이 다수 거주했다. 당시 교세 보고 자료에 의하면 1880년대부터 이 지역에 신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896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전라도 지역을 처음으로 공식 사목방문한다. 이 때 뮈텔 주교는 전라도 지역 복음화를 위해 본당을 신설키로 결정한다. 이듬해 베르모렐 신부는 나바위 언덕 아래에 있는 큰 집 한 채를 구입해 성당으로 꾸몄다.

본당의 모양새를 갖추자 베르모렐 신부는 지역민들의 생활성에 먼저 눈을 돌렸다. 베르모렐 신부는 당시 참혹한 가난으로 영혼까지 병들어가는 신자들과 지역주민들의 생활상을 접하곤,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빌려줄 대지와 전답 사들이는 일에 가장 먼저 힘썼다. 그가 새 성당 건축을 계획한 때는 1905년이었다. 새 성당의 설계는 명동성당 건축을 감독하고 전동성당을 설계하기도 한 포와넬(박도행) 신부가 도왔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

전국 곳곳에 자리 잡은 옛 성당들은 한결같이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와 위풍을 자랑한다. 또 국가 문화유산으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나바위성당도 사적 318호로 지정돼 있다.

▲ 현재 나바위성당의 모습.성당은 구조와 외관의 경우 전통적 한국 목조 건축 양식을 따르면서도 내부 공간 구성은 서양 초기 그리스도교 양식인 바실리카식 교회를 따라 지어, 성당 건축사의 과도기적 건축물로서 관심을 모은다. 특히 교회건축 토착화의 모범으로도 손꼽힌다.

성당에는 현재까지도 남녀 석을 구분하는 칸막이 흔적이 남아 있다. 남녀 좌석을 칸막이로 구분한 형태는 별도의 건물을 지을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동시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반 백성에게 저항감을 주지 않고 전통문화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이다. 건축 10년 만인 1916년에는 나무와 흙으로 된 벽을 헐고 벽돌로 개조했으며, 용마루 부분에 있던 종탑도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 종탑을 세웠다. 또 지난 1955년 김대건 신부의 시복 30주년을 기념해 신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헌금으로 순교 기념탑을, 2007년에는 성당 뒤편 성모마당에 김대건 신부 성상도 세워 성지의 모습을 더욱 폭넓게 다듬었다. 높이 4m, 폭 2.5m 화강암 재질의 이 성상은 국내에서 가장 큰 김대건 신부상이다.

▲ 성김대건 신부상.김대건 신부의 첫 발자국을 담은 나바위본당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풍파 안에서 교육과 신앙의 구심점으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신앙터다.

특히 본당은 새 성당 건축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지만, 교육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실현하고자 1908년 계명학교를 설립했다. 계명학교는 1947년 폐교되기 전까지 일제의 질긴 탄압 속에서도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교육구국에 앞장섰다. 학교가 없어진 자리에는 시약소가 문을 열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회복지 활동의 옹달샘이 됐다. 특히 해방 이후 본당 평신도들의 활동은 더욱 큰 족적을 남겨왔다. 당시 신자들은 교회가 건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도직 단체활동들을 조직해 교회 안팎에서 선교 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이 시기, 본당 산하 공소들의 활동상은 더욱 눈부셔서 각 공소에서는 평신도들이 스스로 조직을 구성해 교리와 기도문을 익히고 전교에 앞장섰고 사제양성 후원에 큰 힘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나바위본당은 6·25 전쟁 당시 전국에서 유일하게 매일 미사를 봉헌한 주체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본당은 주임이었던 김후상 신부가 성당을 비운 며칠을 제외하곤 성당에서는 매일미사를 봉헌해, 관할 구역뿐 아니라 공주, 논산, 이리 등 각 지역에서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려는 신자들이 줄을 이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 전반이 경제개발에 집중하면서 나바위본당의 교세도 여느 농촌본당과 마찬가지로 크게 기울었다. 하지만 본당은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해 성지순례지로 지정되며 한국의 대표적인 성지로 가꿔지기 시작했다. 또한 본당 신자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피정의 집도 건립,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신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꼭 한 번 들러볼 성지·성당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 1890년경에 세워진 나바위 옛 성당 모습.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