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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룡 신부의 교회사 산책] (16) ‘믿거나’ ‘말거나’[평화신문 200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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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0-01-22 조회 1,805회

본문

 1908년 1월2일 전주에서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


낯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의 고생은 이제 끝, 서울 용산에 문을 연 예수성심신학교가 바로 그 해결사가 되어주었다.

1888년 용산신학교에 입학, 1900년 사제품을 받은 한국천주교회 14번째 사제 김양홍 신부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용산을 거친, 최초의 ‘순수 용산신학교 출신 사제’로 기록됐다.

넓은 도량을 지닌 성품과 열정적 사목으로 윗 어른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김양홍 신부, 1908년 전주 어은동 본당에서 보낸 그의 보고서는 ‘기적’, 또는 ‘사적계시’등의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우리 신앙의 혼선을 빚게하는 ‘특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 공소 순방 중에 대략 70여명의 외인들이 영세하였는데 그 중에 30명이 함양 사람이라 그 지방에 많은 이들이 회두할 희망이 보입니다. 농소막이라는 부락에는 예비자가 33명이 있는데 여기에서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즉 이번에 영세한 권가네 집에 매일 밤마다 십자가를 둘러싸고 휘황 찬란한 빛이 비치면서 그 빛 가운데에 작은 십자가들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모두 같은 모양으로 시인하였습니다.

이 기적은 권가네 온 집안이 영세하고 미신적인 물건들을 모두 부수어버린 바로 그날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함양 교우들은 ‘셩총이 함양에 빗최신다’ 고 말합니다. ”

언듯 보기에도 이 보고서는 자신이 들은 사실들을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선교사들 사이에서 사목적 열성 뿐만 아니라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았던 김양홍 신부의 보고는 사안의 미묘함 때문인지 일어난 사실과 자신이 들은 바 있는 내용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다.

이 ‘특별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나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보고서 역시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한 사건의 현상에 대해서만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 안이나 밖이나,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신비스런 현상들, 언제쯤 우리는 그 숙제를 풀 수가 있을까?

“음력 10월20일 경에 어은동 근처인 진안 밭므내에서도 다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부인이 그 남편과 아들은 다 영세했는데 임종이 닥쳐오자 교우들이 모여와서 믿고 영세하라고 권면하였으나 완강히 거절하면서 교우들을 모두 내쫒고 자기 아들을 불러 ‘네가 내게 효도하려거든 나 죽은 후 ‘령실’을 지어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내 아들도 아니다’ 라고 말한 후 죽었습니다.

많은 친척들이 모여들었을 때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겁에 질려 말하였습니다. ‘내 얼굴이 갈기갈기 찢기지 않았냐? 내가 가시밭 길을 가는데 손에 푸른 수건을 든 한 부인이 동자(瞳子)를 데리고 나타나서 ‘네가 이 길로 가면 지옥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빨리 일어나서 영세하여라’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전에 그 부인이 내쫒았던 송회장을 부르니 회장이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보러 왔을 때 부인이 온전한 정신으로 ‘빨리 내게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지옥에 빠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회장이 지난 죄를 통회하라고 권하니 그 여인은 ‘나는 전에 성교회를 욕한 죄 밖에 없습니다’고 말한 후 영세하고 나서 자기 남편에게 ‘내가 자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지 않은 것을 깊이 뉘우칩니다’라고 말한 후 참말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우들이 모여와 그 부인을 교회 예절로 장사 지냈습니다. ”
*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1874-1945)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 9월22일 사제로 수품, 19세기 마지막 서품자가 되었다.

처음부터 예수성심신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했으니 이른바 순수 국내파 신부 제1호인 셈이다. 김신부는 전북 진안 어은동본당을 초대 임지로 제주, 문산, 전주본당 등을 거치면서 폭넓은 사목을 펼쳤으며 특별히 청소년 교육사업과 교세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사목에 대한 열정과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인정 받은 김신부는 드망즈 (안세화) 주교에 의해 1931년 전라도 감목대리에 임명됐으며 전주 감목대리를 거쳐 1937년 전주 감목대리구가 지목구로 승격하자 지목구장으로 임명돼 최초 한국인 교구장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사진설명)
김양홍 신부와 드망즈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