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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국일제강점기 천주교인들의 독립운동 내역 -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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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2-21 10:01 조회8,0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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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국채보상운동
1904년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시켜 일본에 예속시키는 방편으로 차관 도입을 강제하였다. 19072, 정부는 외채를 도입한 지 2년여 사이에 13백만 원의 외채를 떠안게 됐다. 이 금액은 당시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달했으며, 현재로 따지면 최소 14천억 원이 넘는다.
이에 대구의 신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회장은 조선이 일본에게서 제공받은 차관을 상환하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다. 노비와 백정은 그들의 품삯을, 여성은 가락지와 은장도를 유학생과 재외동포들은 의연금을 보내왔다. 이 운동은 교회와 경향신문등의 지지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200만 원 넘는 금액이 모금되었다. 1997IMF 외환위기 때 대한민국의 부채를 갚고자 자발적으로 전개된 금 모으기 운동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에 비유되기도 했다.
201710,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475건이 한국의 15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대구광역시에서는 국채보상로 지정,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과 기념관 운영으로 이 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관련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22315870

 

안중근 토마스의 의거와 동양평화론
구한말 천주교회는 교육, 언론 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근대화 운동의 일환이자 온건한 민족운동으로 이해한 반면, 의병 항쟁을 비롯한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대부분이 프랑스인 선교사들이었던 한국 천주교회 지도부는 일제의 정교분리 요구에 순응하며 무장투쟁을 반대하였다.
안중근 토마스(1879-1910)는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빌렘 신부에게 영세한 뒤 그를 도와 선교활동을 펼쳤고, 1906년 초 진남포로 이사하여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썼으나, 1907년 국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교육만으로는 구국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해외 무장 독립투쟁에 투신한다. 그는 1908년 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 의병 부대의 참모중장으로 활동한다. 190910우러 26, 그는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1910214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안중근은 항소하지 않는 대신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한 시간을 판사에게 청했고, 판사도 이에 동의했다. 이에 안중근은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쓴 다음 동양평화론저술을 시작했다. 서론만 쓴 상태에서 1910326일 처형되었기 때문에 안중근의 구상을 온전히 담지 못했지만, 그가 사형 직전 일본 측 간수와 회견에서 제시한 구상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여 대한제국, 일본, 3국의 협력을 위한 기구를 설치할 것.
대한제국, 일본, 3국의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사용할 것.
3국이 연합군을 창설하여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공동으로 맞설 것.
대한제국과 청은 일본의 지도 아래 경제 개발에 힘쓸 것.
대한제국, 일본, 3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의 중재 아래,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를 맺을 것.
안중근은 일본의 타도가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한 선도 세력으로서 일본의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한 것이었고, 이토를 사살한 것도 일본 전체가 아닌 제국주의 세력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안명근 야고보와 105인 사건
1910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1879-1928)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황해도 안악, 신천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 총독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이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를 통해 일제 총독부에 알려져, 안명근은 19117월 체포되어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강도 및 강도 미수죄로 종신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와 모의한 천주교 신자 한순직, 원행섭도 징역 15년형이 구형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해 ‘105인 사건으로 날조, 확대되어, 천주교 신자 이기당 안토니오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13년 석방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병학학교를 설립한다. 이에 일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의주본당 서병익 신부는 1916105일자로 그를 파문하고 이 사실을 일본 경찰과 뮈텔 주교에게 보고한다. 이처럼 당시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무장투쟁이 교회의 존립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신자들을 고발하거나 파문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의 3.1 운동 참여 경과
191935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학생 60명은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운동장에 모여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립가를 불렀다. 8일에는 대구 시내의 군중 시위에 대비하여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학교 측은 독립선언문 등을 압수하였고, 9일 드망즈 주교가 신학교를 방문하여 무조건 순명을 요구하며 이에 불응할 시 당사자를 퇴학시키고 신학교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신학생들은 43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드망즈 주교는 교장의 건의에 따라 51일 조기 방학 조치를 내렸다.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학생들도 323일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에 뮈텔 주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하고, 그러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서품식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시위를 주도한 신학생들은 퇴학당했다. 만세운동을 위한 움직임은 4월 중순까지도 계속되었으나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끝나고 만다. 신학생들 대부분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주교의 명령에 따르며 만세운동을 포기해야 했다. 이 밖에도 교회에서 운영하던 인천 박문학교, 대구 해성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안성에서는 안성본당 공베르 신부가 만세운동 도중 일본인들에게 쫓기던 주민들을 성당에 들여 보호하기도 했다.
5월 말까지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 수는 53명으로 전체 수감자 9천여 명 중 0.6%에 지나지 않는다. 천주교 신자들의 참여 저조는 위계 중심의 교계제도, 현실참여와 영성생활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앙의 영향이 컸다.

 

자료제공: 주교회의 미디어부(가톨릭대사전, 국사편찬위원회 디지털DB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