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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1년 제37회 성서 주간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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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11-03 08:52 조회1,0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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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성서 주간(2021년 11월 21-27일) 담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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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는 평화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26)라고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고,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요한 20,22-23 참조).

평화는 정의와 함께 성경에서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창조의 뜻이 모든 존재에게 온전히 회복되고 보존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닮게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처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고,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도 자유로울 수 있는 이 관계가 평화입니다. 민족, 재산, 명예, 직위 등 그 어떤 조건에서도 모든 이가 하느님을 닮은 동등한 형제로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차별과 폭력과 같은 부끄러움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평화가 파괴되었습니다. 서로의 알몸을 보여 주기가 부끄러워 몸을 가리고, 하느님에게서도 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창세 3,5) 되리라는 뱀의 유혹은 스스로 모든 것을 지배하여 하느님 역할을 하려는 유혹입니다. 곧 힘을 소유하고 싶고, 그 힘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 우위에 서고 싶은 유혹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악의 뿌리입니다.

그렇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숨에는 죽음을 이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힘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시어 본래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인간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십자가상 속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먼저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우리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자녀들임을 일깨우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주님의 기도 안에 사람들 사이의 일치와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힘주어 말하며, 주님께서 당신 몸으로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다고 선언합니다(에페 2,14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세계적 유행이 시작된 지 이제 2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감염병에 대처하는 세상의 여러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성숙되지 않은 자유의 주장과 힘 있는 이들이 백신을 먼저 독점하려는 움직임도 충분히 보았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선진국으로 자부하는 나라 안에서 인종 차별의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이제 함께 사는 사회, 그리고 그러한 지구촌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찰도 하였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면 단순히 이전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며 함께 가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의식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깨우침과 의식들이 차별을 없애고 서로의 간격을 좁히면서 주님께서 원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평화를 실현하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당장 우리 주변에 관심과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살피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평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맨 마지막에 당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지금까지 창조하신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양을 돌보는 목자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의 영광을 누리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비한 예언을 합니다(로마 8,19-21 참조).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사람은 대자연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할 사명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착한 목자의 모습은, 우리가 전례에서도 자주 노래하는 시편 23편과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돈벌이를 위한 마구잡이 사냥으로 사라져 가는 동물들, 특히 생태계의 파괴는 우리 인간이 피조물에 대한 착한 목자로서 그 의무를 얼마나 무시하고 살아왔는지 똑똑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파괴의 대가를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잘 살기 위해 동식물과 대자연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착한 목자 주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데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생태계 회복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급박한 과제임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이를 위한 공동의 정책들을 찾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실천되고 있지 않습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모든 가정에서는 물론 본당 공동체와 교회 전체에서 긴급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평화의 사도로 파견되었습니다. 평화는 모든 존재가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서로 간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 곧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우리 가운데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예수님을 통하여 또다시 그 모습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 없이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생태계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인 우리 인간을 통하여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웃을 향하여, 그리고 대자연을 향하여 우리의 이 거룩한 임무를 다하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지금이 실천할 때입니다. 


2021년 11월 2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신호철 비오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