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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교우촌과 공소를 찾아가다[가톨릭신문 201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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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11-16 조회 21,8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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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주일 기획] 전주교구 교우촌과 공소를 찾아가다

박해 피해 모였던 곳에 뿌리내린 교우촌
고령화로 오랜 공소들 사라져가는 안타까움도

발행일2018-11-11 [제3119호, 11면]

현재 공소로 쓰이고 있는 되재성당. 한국전쟁으로 전소됐으나 옛 형태로 복원했다.


한국천주교회는 세계에서 유례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여 탄생했다. 그 신앙의 못자리가 교우촌이고 공소이다.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교우촌과 공소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초대교회 이상이 그대로 실현된 곳이다. 전주교구의 교우촌과 공소들을 찾아갔다.


산은 높고 골은 깊었다. 전주시를 중심으로 익산, 완주, 고창과 정읍시 일대에 산재한 전주교구 소속 공소들은 한결같이 굽이진 계곡들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10월의 막바지, 때마침 짙은 단풍으로 물든 산들과 계곡들, 그 풍광만으로도 교우촌과 공소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공소 회장들, 그들이 전하는 공소의 신앙 이야기들 속에서 풍광은 오히려 빛이 바랬다.

 

여산성지를 방문한 순례자들이 성지 해설사로부터 ‘백지사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고통스러운 박해의 흔적들

성지들은 대개 험한 박해의 흔적을 품고 있다. 익산역에서 차로 40분 거리, 얕은 언덕 위에 자리한 여산성당에서 내려다보면 눈길이 닿는 곳마다 형장이다.

1868년 무진박해 때 여산, 고산, 진산, 금산에서 잡혀온 천주교도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배다리에서는 교수형, 숲정이에서는 참수형이 이뤄졌다. 동헌 앞마당에서는 ‘백지사형’이 실시됐다.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를 시키는 사형법이다. 사형은 장날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에 맞춰 실시됐다.

천주교도들은 참혹한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한강이남 최초의 성당이 있는 되재공소는 완주군 고산에 있다. 서울 약현성당에 이어 두 번째 성당이자 최초의 한옥성당이다. 1890년까지 고산에는 공소가 57개나 있을 정도로 곳곳에 교우촌이 형성됐다. 한국전쟁 당시 성당이 전소됐으나 2007년 옛 성당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 충청도 지역의 신자들이 완주군 천호산(天呼山) 일대로 모여들어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 천호공소이다. 호미로 겉흙을 긁기만 해도 돌무더기일 정도로 척박한 땅이었기에 세인의 눈을 피하기에는 더 수월했다.

험한 땅을 일궈 공동체를 이뤄가던 신자들은 1909년 뜻을 합해 고흥 유씨 가문으로부터 45만 평가량의 땅을 매입해 성지로 계발했다. 현재는 30만 평의 부지에 성인 묘역을 비롯해 성당과 피정의 집, 박물관, 봉안경당(납골당) 등을 조성해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찾은 순례코스로 자리 잡았다.
 

동혜원공소 강 칼라 수녀.

■ 박해가 복음의 씨앗을 더 멀리

정읍 신성공소는 시기적으로 조금 더 늦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형성됐다. 박해가 거듭되면서 교우촌은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점점 더 멀리까지 확산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샤를 달레 신부의 말처럼, 천주교를 말살하려던 박해가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린 셈이다.

신성공소는 병인박해 한참 후인 1893년 설정됐고 1903년에 본당이 설립됐다. 현재의 공소 건물은 1903년 부임한 미알롱 신부가 1909년 성당과 함께 지은 사제관 건물이었다. 성당 부근에 기와 굽는 공장을 설치해 성당과 사제관, 사랑채를 지었다. 특히 주위에는 돌담을 쌓았는데, 이는 관군의 기습에 대비한 것이었다.

다른 공소와 달리 고창 동혜원공소는 종교 박해가 아니라 사람들의 천대를 피해온 한센인들이 모여 형성됐다. 1947년 고창읍 죽림리 동혜원(호암마을)에 한센인 수용소가 세워졌고, 1952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됐다. 이탈리아 출신 강 칼라 수녀(75)는 50년째 이 마을에서 한센인들을 위해 살고 있다. 201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강 수녀는 지금도 한센인 후손들과 외부에서 이주한 주민 등 60여 명을 돌보고 있다.
 

되재공소 내부. 남녀 신자들이 분리돼 미사에 참례하도록 가운데에 벽을 뒀다.

■ 초대교회의 이상 실현된 곳

교우촌과 공소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달아난 피신처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들이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뤄 복음을 실천했듯이, 한국천주교회의 교우촌과 공소는 복음적 공동체의 이상,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된 공동체를 실현했다.

여산 성채골공소는 박해시대 천호산 기슭 7개 공소 중 하나로, 전주교구 3대 교구장 김현배 주교, 7대 교구장 이병호 주교, 그리고 8대 현 교구장 김선태 주교의 고향이다.

3살 때 성채골공소에서 여산으로 이주한 김선태 주교는 “철없이 뛰어 놀던 곳이 숲정이, 물놀이 하던 곳이 배다리였고, 학교를 오가던 길에 만나던 것이 백지사터였다”며 “일상 삶 자체가 순교의 의미,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과 함께였다”고 말했다.

김 주교는 “첫영성체 준비를 위한 교리 문답을 제대로 못 외워서 발가벗겨져 쫓겨나 공중변소에 숨어있기도 했다”며 “철저한 신앙교육이 힘들긴 했지만 그것이 사제로서의 삶에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되재공소 송인환(루카) 회장은 “4, 5대 조상 묘를 이장할 때면 십자고상이 함께 나온다”며 “그만큼 마을에 신앙의 뿌리가 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는 “한국천주교회는 1835년 모방 신부가 오기 전까지 50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을 키워나가던 교회”라며 “파리외방전교회 달레 신부는 이를 두고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는 특히 “교우촌은 콩 한쪽도 나눠먹는, 섬김과 나눔, 베풂의 정신을 실천한 예수의 초대교회 공동체 모습을 그대로 구현했다”며 “이상적인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공소 공동체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성공소 전경.

■ 무너지는 공소 되살려야

주교를 3명이나 배출한 공소 마을, 성채골공소에 이제는 개신교 기도원만 3개가 들어서 있고 공소 자리에는 종탑만 덩그러니 남아있다고 한다.

되재공소 송 회장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미사가 있긴 하지만 신자가 30여 명, 그나마 모두 고령이라 공소가 없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신성공소 임춘남(베드로) 회장 역시 “이제는 공소의 종을 칠 젊은이가 없다”고 말했다.

전주교구 사회사목국장 김봉술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의 뿌리는 교우촌, 공소”라며 “도시 본당 중심의 한국교회 안에서 신앙의 보화를 품고 있는 공소의 정신과 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방안을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태 주교는 “사라지는 공소 공동체, 공소가 품고 있는 신앙 유산을 보존할 사목적 선택이 필요한 때”라며 “신앙과 문화유산으로서의 공소들을 선별해서 보존하고, 특히 공소의 정신을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 되살리기 위한 방법을 연구,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