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의 날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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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09-25 조회 2,211회본문
대학 졸업! 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대학을 그만두기를 원하셨고 제 의견과는 상관없이 저를 한국으로 보내셨습니다.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내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하지만 저는 부모님의 결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살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해야 했고, 식구들을 위해서라면 한국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저 떠날게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행복한 모습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비행기 안에서 저는 펑펑 울었습니다.
외국에 산다는 것. 저에게 다가온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였습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해 어디도 갈 수 없었고,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가까스로 회사에 취직했지만, 결국 두 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말을 배우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몇 달 후 다시 일자리를 구했고, 조금씩 한국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어김없이 공허함과 그리움이 찾아들었고 매일 밤 울며 다짐했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하고…
그런데, 2010년 여름,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사실 저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 목표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목표가 남편을 만나 바뀌었습니다.
‘이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도 좋겠다.’ 2012년 8월, 그 사람과 결혼했고, 지금은 8살 아들과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하던 때에도 국제결혼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결혼한 여자, 물질적인 이유로 결혼했다는 시선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바로 이 시선들이 저와 같은 결혼이주여성들에게는 가장 큰 상처입니다. 저희는 그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고,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보통 여자들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는 참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저를 자식처럼 대해 주시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2년 전, 친정아버지가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에 오셨는데 그런 아버지를 위해 시부모님께서 수술비를 보태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남편과 시부모님께 너무나 감사해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 이주사목국 ‘노동자의 집’과, ‘전주 출입국 사무소’에서 일하며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들이 저처럼 행복하면 하는 마음과 제가 겪은 어려움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 일이 많은 이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꼈고, 지금은 국제결혼 안내 프로그램에 관한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기에 이 일들을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주변에는 어렵게 살아가는 결혼이민자와 외국인 노동자가 참 많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듯 그들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기에 저는 그 선물을 나누고 싶습니다. 가야 할 길은 멀지만, 가족과 이주민들이 모두 행복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글 : 조날린(익산 성요셉 노동자의집), 사진 : 교구 이주사목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