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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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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8-20 09:01 조회1,5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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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20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집회 7,32)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집회 7,32).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혜는 이 말씀을 인생에서 따라야 할 거룩한 규율로 제시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그 충만한 의미 그대로 울려 퍼지면서,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오롯이 바라보고 무관심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가난은 언제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난의 모든 개별 상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각각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형제자매들인 가장 작은 이들 안에 당신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마태 25,40 참조).

1. 구약 성경 가운데 집회서를 살펴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원전 200년경에 살았던 현자의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인생사를 더 깊이 통찰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의 활동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외세의 지배를 받아 고통과 슬픔과 가난에 시달리던 혹독한 시련의 때였습니다. 선조들의 전통에 뿌리를 둔 깊은 믿음의 사람이었던 그는 가장 먼저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지혜의 은총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집회서 첫 장부터, 저자는 가난을 비롯하여 삶의 많은 구체적 상황들에 대하여 조언합니다. 그는 시련 속에서도 계속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집회 2,2-7).

2. 집회서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비추어 행동하는 법에 대하여 간추려 놓은 소중한 조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시고 모든 당신 자녀에게 공정과 안배를 펼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느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언급한다고 해서, 인류의 구체적인 상황을 간과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로, 이 둘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올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위한 담화의 주제가 들어 있는 성경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집회 7,29-36 참조).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이루는 연대는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예배를 거행하려면, 가장 가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 축복의 선물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호의를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 축복의 선물을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에 시간을 바친다는 구실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등한시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가 함께 이루어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복해 주시고 기도의 지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3. 이 옛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시의적절합니다! 실제로 하느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고 종교와 문화를 뛰어넘습니다. 약한 이들을 도와주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고통을 덜어 주고 빼앗긴 존엄을 되찾아 주는 호의는 충만한 인간 삶을 위한 조건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그들의 다양한 요구를 돌보기 위한 선택은, 자신에게 편한 시간이나 개인적 흥미, 또는 모호한 사목 계획이나 사회적 계획에 따라 좌우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권능은, 늘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성향으로 억누를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늘 주시하고 있기란 어렵지만, 우리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러한 눈길이 필요합니다. 이는 좋은 말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이끌려 구체적인 삶으로 투신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저는 교회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이 진리를 되풀이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늘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요한 12,8 참조) 우리가 일상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4.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늘 자극을 받고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의 소외와 고통을 없애 주거나 적어도 이를 덜어 주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적 빈곤의 상태에 있는 그를 도울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다른 이들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으로 이러한 나눔의 경험에 동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면,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직접 복음적 가난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류 가족의 구성원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소외되어 음지에 있을 때, 우리는 ‘괜찮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침묵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백성은 최일선에서 그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많은 위선과 헛된 약속에 맞서 그들을 수호하며 그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이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는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사랑을 증언하고 실천합니다. 나아가 교회는 기초 생필품도 없는 이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모든 이에게 공동선의 큰 가치를 일깨워 주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임무입니다. 이는 기본적인 요구 사항들에서 인간 존엄을 침해당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5. 손길을 뻗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 안에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향하는 많은 손길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삶의 속도 때문에 점점 더 우리는 무관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결국 날마다 소리 없이 큰 호의로 이루어지는 주위의 많은 선행을 더 이상 알아차리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삶의 흐름을 뒤바꿔 놓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눈은 “옆집” 성인들의 선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은 우리 한가운데에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합니다”(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7항). 그러나 그 누구도 이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신문 지면, 인터넷 웹사이트, 텔레비전 화면에는 안 좋은 소식들만 차고 넘쳐서, 마치 악이 패권을 장악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악의, 폭력, 권력 남용, 부정부패가 없지는 않지만, 삶에는 존중과 호의의 행동들도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러한 존중과 호의의 행동들은 악을 기워 갚아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 북돋우고 우리 마음을 희망으로 가득 채워 줍니다.

6. 손길을 뻗는다는 것은 하나의 표징, 곧 친밀함, 연대, 사랑을 곧바로 연상시키게 하는 표징입니다. 전 세계를 고통과 죽음, 절망과 혼돈에 빠트린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린 최근 몇 달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도움의 손길을 볼 수 있었습니까! 올바른 치료법을 찾고자 애쓰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피는 의사들이 내민 손길. 근무 시간을 초과하여 환자들 곁을 지키며 돌보는 간호사들이 내민 손길. 가능한 한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행정가들이 내민 손길. 사람들과 접촉하는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수많은 긴급한 요구에 응답하는 약사들이 내민 손길. 안타까운 마음으로 강복하는 사제들이 내민 손길.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집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이 내민 손길. 기본 서비스 제공과 보안을 위하여 일하는 이들이 내민 손길. 이러한 도움의 손길들은 이 밖에도 많아서, 전부 모으면 긴 선행록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모든 손길은 감염과 두려움에 맞서 도움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7. 이번 감염증의 세계적 확산이 예기치 않게 들이닥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우리는 심한 당혹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를 향한 손길은 결코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손길은, 가난한 이들을 더욱 잘 알아보고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을 도우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비의 도구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여 먼저 내밀어 주는 손길을 우리가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기는 많은 확신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유의 제약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욱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사랑하는 이들과 예전이라면 평소에 늘 만나던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들을 불현듯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하여 의문이 들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집 안의 침묵 속에 머물면서 소박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돕고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제애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 있음을 다시 깨달을” 좋은 때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윤리, 선, 신앙, 정직을 비웃으며 도덕적 타락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 사회생활의 기초가 무너지면, 인간이 개인적 이익을 지키려고 서로 다투게 되고,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잔인함이 발생하며, 환경 보호를 위한 참다운 문화의 증진이 저해됩니다”(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29항). 요약하자면, 우리가 각자 이웃과 모든 사람을 향하여 느껴야 하는 책임감을 일깨우지 않는 한, 경제와 금융과 정치의 심각한 위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8.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 따라서 이 말씀은, 자신이 공동의 숙명에 동참하고 있음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저마다 지닌 책임감으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약한 이들의 짐을 짊어지라는 권고입니다. 이는 바오로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 일치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5,13-14; 6,2).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자유는 다른 이들, 특히 가장 약한 이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우리의 책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여기에서 또다시, 집회서가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집회서는 가장 힘없는 이들을 돕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먼저, 집회서는 슬퍼하는 이들의 약한 처지를 고려합니다. “우는 이들을 버려두지 마라”(집회 7,34). 감염증의 세계적 확산 시기에, 우리는 엄격한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친구나 지인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젖어 있어도 그 곁에서 위로조차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집회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병자 방문을 주저하지 마라”(집회 7,35).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우리 존재의 나약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은 우리가 결코 안주하지 말고 계속 사랑의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9.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 이 말씀은, 가난의 상황에 아무 감응 없이 주머니에 손 넣고 서 있는 자들의 대조적인 자세를 부각시킵니다. 흔히 이러한 자들이 가난의 상황을 조장한 공범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그들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호의의 손길과는 딴판입니다! 사실 그들도 손을 뻗기는 하지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세상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돈을 송금할 때뿐입니다. 이로써 그들이 뻗은 손은 소수 집권층의 부만 늘리고 수많은 사람의 비참한 상황을 더 악화시켜 모든 나라를 파탄으로 몰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무기 판매로 돈을 축적하고자 손을 뻗고, 이 무기들은 다른 이들, 심지어 어린이들의 손에도 쥐어져 죽음과 가난의 씨앗을 뿌리는 데에 이용됩니다. 부를 축적하고 호사스러운 찰나의 방탕한 삶을 위하여 음지에서 죽음의 약물을 거래하는 데에 뻗는 손들도 있습니다. 부정하지만 손쉬운 이익을 얻고자 불법 청탁을 뒷거래하는 데에 뻗는 손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위선적 체면치레 때문에 스스로도 지키지 않는 법률을 제정하는 데에 손을 뻗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배척된 이들은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생활 양식을 유지하고자, 또는 이기적인 이 이상을 열광적으로 쫓고자, 사람들은 무관심의 세계화를 펼쳐 왔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54항). 죽음의 씨앗을 뿌리는 이 손들이 온 세상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도구로 바뀔 때까지 우리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10. “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집회 7,36). 집회서 7장은 이 표현으로 묵상을 마칩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언제나 우리 삶의 마지막 때를 유념할 필요가 있음을 드러내 주는 해석입니다. 우리의 공동 숙명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보다 가난하고 우리와 동일한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우리 각자가 지향하는 목적 또는 목표를 강조합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 삶의 목적을 위해서는 계획의 실현과 여정의 부단한 완주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목적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여정의 최종 목표이고, 그 무엇도 우리를 이 목표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랑은 나눔이고 헌신이며 봉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고 사랑으로 깨어났다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미소를 마주하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그 순간, 바로 우리 삶의 이 목적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미소도 사랑의 원천이 되어 우리가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이처럼, 가난한 이에게 뻗은 손길은, 그리스도 제자로 살아가는 오직 그 기쁨으로 소리 없이 겸손하게 도움을 주는 이들의 미소로 언제나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가난한 이들과 만나는 이 여정에서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천주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십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소외받는 이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마구간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의 위협 때문에,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 배필이신 요셉과 어린 예수님과 함께 다른 나라로 피신해 가셨습니다. 성가정은 여러 해 동안 난민으로 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이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봉사하는 모든 이가 하나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기도를 통하여, 가난한 이에게 뻗은 손길이 나눔과 되찾은 형제애로 감싸 안는 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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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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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