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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민과 함께 한 임실 치즈의 아버지[가톨릭신문 201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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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05-07 조회 22,796회

본문

전주교구 지정환 신부 선종

가난한 농민과 함께 한 ‘임실 치즈’의 아버지

벨기에 출신 선교사… 60년간 한국교회 위해 헌신
치즈 공장 세워 자립 돕고 장애인 재활센터도 설립

발행일2019-04-21 [제3141호, 25면]

4월 13일 선종한 지정환 신부. 벨기에 출신으로 1959년 한국에 온 후 6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며 가난한 농민을 위해 헌신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 치즈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정환(벨기에 이름 디디에 세스테벤스, Didier t‘Serstevens) 신부가 4월 13일 오전 9시55분 전북대 병원에서 숙환으로 선종했다. 향년 88세. 장례미사는 16일 오전 10시 전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됐다.

전주 중앙주교좌성당에 마련된 빈소에는 선종 이후 장례미사가 봉헌될 때까지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추모객들은 28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와 가난한 시골에서 빈곤을 물리치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지 신부의 선종을 안타까워했다.

임실군은 선종 이틀 뒤인 15일, 지정환 신부가 낯선 이국 땅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특히 한국 치즈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는다고 밝혔다.

지 신부가 평생을 바친 임실치즈마을 송기봉(62) 운영위원장은 지 신부 선종 후 “신부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임실 주민들은 너무나 가난했다”며 “신부님은 신앙과 함께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 신부는 벨기에 브뤼셀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전교협조회(SAM)에 입회, 1958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12월, 전쟁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한 한국에 도착했다.

전주 전동본당 보좌에 이어 잠시 임실본당 주임대리를 맡았던 지 신부는 1961년 7월 부안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3년 뒤인 1964년 6월 척박한 산골 마을인 임실군에 부임한 지 신부는 극도의 빈곤에 고통받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 산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팔고 남은 산양유가 많자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고 소박하게나마 치즈 공장을 세운 것이 1967년의 일이다. 치즈 생산이 생각보다 쉽지 않자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견학을 가 치즈 생산 기술을 배웠고 1969년 비로소 성공적으로 치즈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지 신부는 나중에 이 치즈 공장의 운영권과 소유권을 모두 주민협동조합에 넘겨 자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가 세운 임실치즈 공장의 열매는 현재 매년 270억 원에 달하는 소득으로 나타나고 있다. 임실군은 지 신부의 업적과 노고에 감사하는 뜻으로 지난 2017년 그가 세운 치즈 공장과 거주하던 집 등을 복원해 ‘임실치즈 역사문화공간’을 세우기도 했다.

독재 하의 한국 국민들의 상황에도 눈을 돌린 지 신부는 1970년대 유신 체제를 비판하고, 다른 여러 명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독재에 저항했다. 그로 인해 당국에 체포돼 추방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한국의 치즈 산업으로 지역 경제에 이바지한 공적이 인정돼 추방 명령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에 제공하기 위해 우유를 차에 싣고 광주까지 갔다 온 일화는 유명하다.

지 신부는 1984년에는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 ‘무지개의 집’을 설립했다. 호암재단은 2002년 장애인 자활에 헌신한 공로로 ‘사회봉사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는 상금 1억 원을 모두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돕는 데 흔쾌히 내놓았고, 이 기금을 토대로 무지개장학재단이 2009년 만들어졌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