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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로 뿌린 씨앗 단단한 신앙으로 부활하다[가톨릭신문 201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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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05-07 조회 22,556회

본문

전주교구 개갑순교성지를 가다

순교로 뿌린 씨앗, 단단한 신앙으로 부활하다

조선시대 개갑장터에서 순교한 최여겸 복자 기리는 성지 조성
조형물의 성화보며 영성 묵상
현재 신자들 헌신적 모습 보며 복자의 생전 복음화 노력 실감

발행일2019-04-21 [제3141호, 9면]

개갑순교성지 안 십자가의 길 제15처인 빈 무덤 주제 부활동산. 죽음을 이기시고 빈 무덤의 돌을 치우고 나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왼쪽에는 이 광경을 목격하는 여인들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지에서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최여겸 복자의 순교영성 속에 부활신앙을 묵상할 수 있다.

 

 

사도들은 신앙을 포기하라는 강요에도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을 선포하며 믿음을 증거했던 사도들은 순교로써 다시 한 번 믿음을 증거했다. 한국의 순교자들 또한 박해 앞에서 사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순교를 택했다. 이는 곧 부활신앙에 근거한 믿음의 증거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순교자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개갑순교성지를 찾았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이곳에서 순교한 복자 최여겸(마티아·1763~1801년)은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했고, 참혹한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성지 입구의 바위 뒤편에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라는 성경 말씀이 적혀 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이유를 일깨워주고 있다.


■ 최여겸 복자 순교한 성지

개갑순교성지는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198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산IC와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전남 영광군과 가깝다. 주변은 대부분 농림지역이다.

전주교구 고창본당(주임 김대영 신부)은 조선시대 개갑장터였던 이 자리에서 최여겸이 순교했다는 역사적·교회사적 사실에 근거해 2002년부터 고창군과 함께 개갑순교성지를 조성했다. 고창본당은 총 1만6500㎡ 규모 부지를 마련하고, 2013년 9월 28일 당시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주례로 성지 축복식과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했다.

성지에 들어서자 높이 12m 순교현양탑이 우뚝 서 있다. 현양탑에는 최여겸 복자의 순교 장면과 고통스러워하는 이웃 신자들 모습이 색유리 벽화로 장식돼 있다. 이외에도 성지 야외 제대와 십자가의 길 14처 등에 복자의 삶과 영성을 표현한 색유리 벽화가 기도를 돕는다. 대부분 원로 유리화가 남용우(마리아)씨 작품이다. 남 화백은 남종삼(요한·1817~1866년) 성인의 증손으로, 성 라자로마을 성당 유리화, 노틀담수녀회 본원 성당 유리화, 서울 흑석동성당 납골당 제대 배경 모자이크 등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성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지막 단계인 제15처는 ‘빈 무덤’을 주제로 한 부활동산이다. 예수께서 돌을 굴려 나오시는 광경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마주하는 듯, 빈 무덤에는 주님 부활의 생생함이 느껴진다. 빈 무덤 뒤편 윗부분에는 십자고상, 아래에는 피에타상이 있다. 하느님 말씀에 순명했던 구원사업의 핵심 조력자, 그리고 아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한없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였던 성모 마리아의 감정이 묻어난다. 피에타상 앞 긴 의자에 한참을 앉아 기도하고 묵상했다.

빈 무덤 맞은편으로 걸어가면 야외 제대가 있다. 제대는 고창의 문화유산인 고인돌 형태로 만들었고, 뒤편에 색유리 벽화가 있다. 벽화에서 최여겸 복자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하늘로 올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양편 아래에는 복자에 의해 세례 받은 28명이 기도하고 있다.

제대에서 다시 순교현양탑 쪽으로 걷다보면 복자의 참수터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순교현양탑에서 봤던, 복자의 잘린 목을 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신자들 모습이 겹쳐졌다. 218년 전, 이곳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 어떤 고통도 꺾을 수 없었던 신앙
 

성지 입구의 순교현양탑. 탑에 새겨진 성화에서 최여겸 복자의 순교와 부활을 떠올릴 수 있다.


신유박해가 한창이던 1801년 8월 21일.

“최여겸은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형조의 사형선고가 떨어졌고, 동시에 최여겸은 그의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8월 27일, 개갑장터에서 최여겸은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린다.

전라도 무장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은 일찍이 복자 윤지충(바오로·1759~1791년)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또 혼인한 뒤에는 처가가 있는 충청도 한산에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1759~1801년)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뜨거운 신앙심을 갖게 됐다. 고향 무장으로 돌아온 최여겸은 복음화에 힘쓰며 흥덕, 고창, 영광, 함평 등지에서 28명을 세례 받도록 이끌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여겸은 한산의 처가로 피신했다. 그러나 최여겸에 의해 입교한 이들이 체포돼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고 말았다. 한산에서 체포되고 무장으로 이송된 최여겸은 극심한 문초를 당했지만, 어떤 고통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최여겸은 고향 무장의 개갑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최여겸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됐다.


야외 제대. 색유리 벽화는 남용우씨 작품이다.

 

 

■ 순교의 피, 신앙의 씨앗 되어…

최여겸 복자는 순교로서 진정한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증거 했다. 그의 순교는 전라도에 단단한 신앙의 씨앗으로 뿌려졌다.

전라도 복음화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과, 무장을 중심으로 한 해안지방으로 구분한다. 내륙지방은 전주의 사대부 출신 유항검이 전주와 고산, 진안, 진산 등지로 교세를 확산시켰다. 해안지방은 무장의 최여겸 복자가 펼친 전교활동을 들 수 있다.

전주교구 심원공소와 개갑순교성지를 담당하는 김정열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이 지역 신자들의 헌신적 삶의 모습에서 순교복자가 내렸던 신앙의 뿌리를 깨닫는다고 말한다. 김 신부는 “이곳 구교우들은 하느님 앞에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을 보여준다”면서 “오직 하느님만 보고 가야한다는 모습에서 순교자들의 신앙이 바로 저러하지 않을까 하며 많은 것을 배운다”고 밝혔다.

김 신부는 또 최여겸 복자의 삶과 신앙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학술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최여겸 복자의 전교활동은 고창지역뿐 아니라 광주대교구 관할지역에까지 미쳤다”고 말한 김 신부는 “이곳에서 복자의 선교 열망이 무엇일까 묵상하며 그분을 따르고자 기도를 바치고 있다”고 했다.
 

우세민 기자 semin@catimes.kr
사진 박원희 기자